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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0. 먼저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범죄/스릴러인가? 그러나 대답을 잠시 보류한다.


나는 이 책을 '코맥 매카시'를 읽는 일환으로 집어들었다. 그러나 내가 암묵적으로 기대한 것은 <핏빛 자오선>이나 <국경 3부작>처럼 매카시의 시적 문장에 따라 펼쳐지는 무궁한 이야기 같은 건 아니었다. 나는 이걸 돈가방 스릴러류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모든 게 선과 악의 대치로 끝날 것이라 상상했으며, 끈질긴 추격과 총격적을 떠올렸다. 이전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랬다.


그러나 이후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무엇인가. 물음을 다시 불러온다. 이 책은 범죄/스릴러인가? 옳다. 그것은 <국경 3부작>이 서부극인가? 라는 질문과도 상통한다. 하지만 질문을 바꾼다. 이 책은 오직, 범죄/스릴러인가? 아니다. 이 책은 엄연히 내가 사랑하는 코맥 매카시의 책인 것이다. 나는 또 다시 매카시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국경 3부작>과 <핏빛 자오선>에 대해서는, 이전의 매카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나는 거기에 그려진 미국을, 소년들을, 죽음을, 삶을, 완전히 말로 토해내기에는 시기상조라고, 그 책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말은 내게 없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나는 말들을 발견했다. 나는 매카시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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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에 대하여_문체, 대화, 독백

<노나없>은 시종일관 3인칭으로 진행되던 일전의 책들과는 다르게 보안관 벨의 독백이 파트 첫 머리마다 실려있다. 그외 본 파트의 체는 여전히 시적이고, 하드보일드한 느낌을 보유하고 있지만, 작품에서 실상 세계의 사건을 드러내는 본파트보다, 독백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관통한다는 느낌을, 즉 매카시의 다른 작품보다 '많은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카시의 문체는 읽어본 사람이라면 주지하고 있듯 자연 경광을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장황하게 표현하는 시적인 어투를 사용한다. 매카시가 담담하고도 시적인 어투를 통해 조명하는 것은 풍랑이다. 시선은 세계에 있다. 세계는 인간과는 무관하며, 아름답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묘사가 인물들의 운명과 깊이 얽혀들어간다고 하긴 힘들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어찌 되었든 존재하는, 세계의 무위함을 비춘다. 그렇기에 작중 인물들은 모두 세계 속의 인간이다.


노나없에서도 이와 같은 묘사는 빠지지 않는다. 작품의 주요 무대는 사막이고, 인간들에겐 갈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지옥이다. 인간들은 자연에 맞서 항상 계측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 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풍랑을 조율해야 한다. 그러나 사막 한가운데 악이 빠지는 순간, <노나없>은 인간의 이야기로서, 시작된다.


묘사가 세계의 틀로 존재하나, 그것으로 매카시의 작품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매카시 작품을 지탱하는 중심은 실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말에는 침묵으로 다 할 수 없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함유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입에서 나와 다른 인간에게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거대한 세계의 흐름에서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만이 인간의 거의 유일한 흔적이다. 누구도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 그것이 발화의 틀을 타고 작동하면서 이야기군을 이룬다. 국경 3부작 등의 작품은 이러한 이야기군을 가로지르는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길에서 인간들을 만나고, 사연을 듣는다. 그들의 모험은 이런 길고 짧은 인물들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찌 보면 성경의 구성과도 비슷한지 모른다. 순례자와 순례담. 그리고 다음 세대의 순례.


독백은 인간의 언어중에서도 독특한 편이다. 대화가 전승되는 거라면, 독백은 자신에게 전승하는 것이다. 독백은 일종의 점이나 예언이다. 독백은 이야기를 거슬러가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과거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점치고, 그것을 예정된 미래로 연결한다. 장마다 되풀이되는 보안관 벨의 이야기는 개인, 가정, 세대, 국가의 이야기다. 한편 그것에 대한 해석이며, 앞날에 대한 예지이기도 하다. 독백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시간성을 완성한다. 노나없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벨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완성되는 일종의 일대기다. 그렇기에 노나없은 매카시의 모든 작품중에서도 가장 묵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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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악의 성문법과 불문율에 대하여

노나없에서 표면적으로나 표현적으로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선악의 문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자니 이곳에 선은 없어보인다. 단지 악이 도래하고 모든 게 부숴지리라 예상할 뿐이다. 노나없을 이해하기 위해선 1차적으로 안톤 시거의 존재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의 시작은 이것이 잔혹한 범죄/스릴러라고 선언하듯 시거가 살인을 저지르고 담담히 탈출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거 자체만으로 묵시적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시거가 대단히 초월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틀림없지만, 시거가 정말 두려운 존재가 되는 건 악의 실재 또는 선의 부재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에 악 이후 인간이 감당해야할 짐이 맡겨지때문이다.


시거의 존재는 홀든 판사와도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홀든 판사가 신민들을 찍어누르는 단단한 법과 벌로 이루어진 성문법적 존재라면, 시거는 인간을 이루는 불가해한 내재율에 따라 추동하는 불문율적 존재다. 판사가 세계의 법규를 등에 업고 엄벌을 선사한다면, 시거는 이것이 신이 알려주지 않는 너희들의 운명이노라고, 또한 우리는 단지 약속을 했을 뿐이라고 선언한다. 신민을 옳게 다스리는 압도적인 성문법과 달리, 시거는 무법 지대 인간들이 지어낸 말들이 얼마나 무서운 효력을 발휘하는지 보여준다. 시거가 하는 불가해한 말들과, 얼핏 우연처럼 보이는 내밀한 규칙들은 모두 인간의 묵시를 가리킨다.


그래서 선거로 분투하여 뽑힌 보안관 벨은 묵시에 가닿지 못한다. 노나없의 구성은 얼핏 긴박한 추격전처럼 보이지만, 실상 인간이 세운 정의는 악이 일으킨 사건들을 영영 맴돌기만 할뿐, 그것에 대해 어떠한 개입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벨은 '모르겠다' '우리로선 알 수 없다'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가 느끼는 것은 깊은 무력감이다. 이것은 죽은 인간들 대신 그에게 부과된 징벌이다. 악이 일으키는 사건 자체보다는 악 이후의 세계에 만연한 이런 죄악감이 노나없의 진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노나없이 범죄/스릴러로 완성될 수 없는 이유이며, 단지 모호한 묵시록으로 끝을 맺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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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의 정의에 대하여, 미래의 악에 대하여

노나없은 독백을 통해 벨의 이야기를 개입시키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그곳과 여기, 그리고 저곳에 대해 말한다. 이런 구성은 마치 포크너의 작품을 연상케한다. 남서부 황야에 세워진 가문의 이야기, 삶들이 복잡하게 얽혀들어감으로 인해 더는 풀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어지는 매듭. 미국, 미국적인 것의 형성, 완성. 매카시는 선과 악을 중심으로 한 추격전의 한편에서, 기묘한 땅에 펼쳐졌던 무위내막들을 하나하나 들춰낸다. 이 땅의 한구석에는 정의에 대한 신의가, 그러나 또 한편에는 인간의 삶을 무대로 한 온갖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벨의 이야기는 신의에 대한 것이며,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완성하려 발버둥치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러 신의가 세계의 불문율과 충돌하며 결국 모든 게 무너져내릴 때,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스릴러로 시작한 소설은 벨의 가계 이야기로, 자신이 보안관을 그만두는 이야기로, 모든 사건들의 내막으로 끝을 맺는다. 시거는 사람들을 죽일 때마다 '그것을 알면 뭐가 달라지나?'라고 물으나, 벨은 시거가 홀연히 사라진 뒤에도 그것을 묻는다. 그게 어떤지. 어째서 그것이 그랬으며, 지금은 왜 모든 게 이런지. 그 물음에 다가갈 수록 시거의 말처럼 진실과 이 세계에는 하등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미 그것을 대답할 악은 사라진 상태다. 질문은 늘 소강된다. 말할 수 있는 자는 늘 비탄에 빠진다.


소설은 끝에 가닿은 이들에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이처럼 괴상한 세계, 세계가 점점 어둠에 젖어든다는 자각. 그리고 확신.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아니 한편으론 지금까지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 이 두 질문은 긴밀히 연결된다. 죽은 이들이 말을 잃을 때 가책은 남아있는 자들에게 넘겨진다. 벨은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며 보안관을 그만둔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의기양양한 정의로서 활동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러나 그 모든 일을 겪고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노나없이 다다른 곳은 묵시이자 묵시의 시작이다. 여전히 모든 문제에 해답내지 못한 채, 우린 어영부영 다음 세대로,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겨진 채로. 세계에 홀연히, 운명의 자국을 흘린 채로.




4.


노나없의 묵시는 아름다운 묵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매카시의 작품이 아름다운 건 단순히 그 문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건 이후 무고하게 남아있는 돌멩이 때문일 수도 있고, 모스에 죽음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는 우리의 슬픔 때문일 수도 있다. 매카시의 아름다움은 발현보다는 발견되는 지점에 있다. 소년이 터덜터덜 말을 타고 거대한 세계를 가로지를 때, 그것만으로는 어떤 웅장함이나 서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목격한 뒤에야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다. 매카시의 이야기가 묵시 이후 남은 이들의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지켜본들이야말로,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이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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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어서 사흘만에 다 봤음...

갠적으로 핏자보다 더 좋게 읽었음

순례적 구성이었던 핏자랑 다르게 시선들이 계속 교차하는 것도 재밌었고


중간중간 독백에서 묻어나오는 고뇌랑

계속해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주는 긴박감이랑

잘 어울리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좋게 읽었음


국경 3부작, 핏자에 비해 주제의식이 꽤 직접적으로 툭툭 나오길래 신기하기도 했던...

지금까지 읽은 것중엔 국경 3부작 > 노나없 > 핏자 순으로 좋았음


이제 로드랑 신의 아이, 패신저&스텔라마리스만 남았네...


벌써 그립습니다 매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