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7장
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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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신의 변화와 발전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경이로운 글입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이 인식하는 신의 모습이 발전한다는 것에 가깝지만.
원시 인류에게 태양은 낮의 하늘을 순항하는 절대적이며 이해 불가능한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843년, 독일의 천문학자 슈바베가 불에 그을린 색유리로 관측한 태양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절대적인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원 호의 외곽에선 모닥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불꽃이 타올랐고, 내부엔 흑점처럼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흠결도 존재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동설이 대세가 되고, 광년 단위로 떨어진 천체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태양의 절대성은 더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인류와 지구의 생명체에겐 절대적이었고 유일했던 태양은, 사실 밤하늘과 우주 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존재하는 항성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태양의 본질이 변한 것도 아니며, 나아가 우리 태양계 중심의 항성이 가진 중요성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창조한 인간의 죄악을 홍수로 인한 죽음으로 심판하는 신과, 창녀와 세리는 물론 자신을 배반한 인간까지 용서하고 사랑했던 신약의 신이 똑같은 존재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신이 성장하고 변화하고 성숙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시 시대, 원시인이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던 태양과 현대인이 바라보는 태양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찰자의 소양과 수준이 달라졌을 뿐.
인간 사이에서도 이같은 변화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아 시절 바라보는 부모는 절대적이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입니다. 사춘기 시절 바라보는 부모는 타인보다 날 이해하지 못하고 날 억압하는 존재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람직한 성장기를 보낸 후 부모의 품을 떠난 자녀는 성인의 삶의 여러 관문과 절차를 겪으며 부모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비약적으로 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창세기 저자의 시대에 존재했던 모든 악과, 도덕적 기준이 높은 유일신교 신앙을 지키던 민족의 분투와 고난, 한때는 분명 더 푸르고 기름졌음을 관찰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젠 갈수록 척박해지기만 하는 중동의 자연환경, 산 꼭대기에서 발견되는 바다생물의 화석과 자취...
이런 여러 모순과 부조리를 규명하길 포기하지 않고, 정의와 의가 가치있는 세상과, 이런 세상을 관장하는 신의 선의와 그런 신을 따라야 한다는 공리를 설득력있게 만들어 내기 위한, 분명 한둘이나 한 시대가 아닌, 수많은 이들의 수 세대 동안의 고뇌와 성찰이 이 이야기 속엔 들어있습니다.
기술의 발전 - 특히 언어와 그 기록 방식의 발전 - 으로 인해 신이라는 존재가 박제되어 버린 것이 참 아쉽죠. 망각으로 인한 구멍이 생겨야 성장한 관찰자가 채워넣을 틈이 생기는 신이란 존재의 특성상, 역사의 안정성이 올라갈수록 신의 성장은 정체될 수밖에 없으니. 근대에 와서는 신의 성장이 아예 멈춰버린 게 아닌가 싶네요.
신이 필요하지 않기에 신의 성장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치부하기엔, 현대 사회에서 정말 신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인가? 하면 또 그건 아닌 거 같고. 그러나 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들은 그저 박제된 신에게 안주하거나 (이만큼 나이를 먹은 사회는 항상 개인보다 크니까, 이거도 어느정도는 자연스럽죠) 인류에게 더이상 신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거 같아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