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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8장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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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홍수를 멎게 했습니다.


물은 줄어들고,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고, 새롭게 생명은 시작되어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옵니다.


무생물까지 설레게 할 긴 겨울 후의 새로운 봄 풍경처럼 생명력과 새로운 희망이 넘치는 분위기로 서술된 장이지만, 잠시 홍수로 뒤덮인 세상에서 생명을 잃은 셀 수 없이 많은 존재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설화와 전설에 불과할 본 장에서 실제로 목숨을 잃은 생명체를 추모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죽음과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이 대목이 선민 사상의 기원임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변화와 갱생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사라진 노아 외의 모든 인류와 생명체. 그에 대한 생각이나 서술 따윈 불필요하다는 듯 여상하게 이어지는 서술은, 한때 인류의 고고학적 역사와 자유의지,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이성과 의지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란 존재의 특수성을 그 어느 철학자들보다 일찍 간파하고 깊게 사고했던 저자와 동일인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입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세계관이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시기로 이어져, 지나친 폭력성 때문에 곧잘 사회적 지탄을 받는 1인칭의 학살 게임과 다를 바 없는 가나안의 이민족에 대한 죄책감 없는 학살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요?


되풀이해 쓰게 되지만 창세기를 쓴 저자가 1장에서 3장 무렵까지 보이는 세계와 인간의 본질과 모순에 대한 통찰, 도덕와 '올바르고 가치있는 삶'에 대한 열망은 탁월하고 놀랍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놀랍고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인식이 필연적으로 타 민족이나 자신과 같은 세계관,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는 배타적 우월의식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재능을 가진 아이가 부모나 친척, 주변 공동체의 구성원들과의 연대와 애정 속에서 자란다면 뛰어난 능력과 함께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가진 겸손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출생 직후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라난다면? 그가 만나는 대다수의 타인이 자신보다 열등할 뿐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들이라면?


거친 비유이긴 하지만 저는 고대 중동 지역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극도로 윤리적인 유일신 종교를 가진 민족의 상황은 위 사례 중 후자에 해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민족에겐 타 민족과의 공존보단 절대자에 의한 물청소가 훨씬 더 바람직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타자란 동등한 인간이 아닌, 죄악혹은 더러움 그 자체인 청소 못한 욕실의 곰팡이 정도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수 백, 수 천 분의 일보다 낮은 확률로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 안에서도 뿌리깊은 인간의 죄상은 계속됩니다. 이 냉정한 자아성찰적 시선이 노아의 설화의 깊이를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