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0장
32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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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의 족보입니다.
리셋된 인류라는 설정으로 당대 이스라엘 민족이 인식하고 있던 세계와 민족 분포를 설명하려는 시도.
장자인 샘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니, 유대인의 선조일 것입니다.
둘째 함의 자손들이 자리잡는 땅은 구스(에디오피아), 이집트, 리비아 등이니, 9장에서 아버지의 실수와 성기를 보고 비웃어 저주를 받은 못된 아들의 후손이 아프리카에 정착한 흑인, 혹은 중동 지역의 이방 민족이 되었다는 서사가 완성됩니다.
야벳의 후손들은 스페인, 로도스 등 지중해 도시에 자릴 잡았으니 그리스, 로마 등의 백인 혹은 유럽인을 표현하는 것일 듯 합니다.
고고학과 현생 인류의 DN.A를 비교대조한 근거를 통해, 우리는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약 10만에서 6만 년 전 다른 대륙으로 이주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가 쓰여지거나 진지하게 읽혔던 시대 즉, 고고학과 과학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때에 저 족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미망과 무지의 시대였다고 해도, 저 구절을 근거로 특정 민족이나 흑인에 대한 차별, 노예 무역 등을 정당화했던 것,
노예 무역의 가장 큰 수혜를 입었던 미국과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기독교 국가들이 성서의 저 구절을 근거로 노예제를 활용하고 흑인들을 탄압한 것,
광복 후 미군정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의 지도 속에 현대 국가의 기틀을 다지며 정치, 사회 구조와 함께 종교까지 수입한 한국의 개신교 목회자들 역시 저 부분을 설교할 때마다 흑인이란 인종의 열등함과 경솔함을 주창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무오설과 문자 그대로의 성서를 받아들이는 답답하고 어리석은 태도는 보수성과 순수한 신앙을 위한 태도가 아닙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면,
왜 우리나라의 개신교 목회자들은 레위기와 신명기 등에 규빗 단위로 상술된 성전(성막) 건축 방식은 무시하는 걸까요?
이슬람의 할랄 규정보다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식재료와 생활 규범을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논의와 해석을 통해 까맣게 망각하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이 직접 구약 성서 전체를 통해 반복해 확정한 가축을 태워 바치는 번제라는 예배 형식은, 대체 언제부터 냉난방 장치가 완비된 실내에서의 쾌적하고 편리한 방식으로 바뀐 것일까요?
역시 하나님이 직접 규정하고 명한 유대인들의 갖가지 종교 기념일의 풍습은, 왜 헌금 봉투 위의 빌미로서의 이름만 남은 채 모조리 사라진 것일까요?
이토록 많은 것들이 충분한 논의나 재해석 없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면 돈과 물질에 관련된 규범,
특히 고대 이스라엘은 제정일치 국가였기에 세금과 국가 유지의 중심인 종교 인프라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역할을 겸했던 십일조 규범은
제정분리가 기본인 현대 국가에도 그대로 남아 강요되는 것일까요?
도대체 누가, 어떤 기준과 판단으로,
구약에 가득한 신의 명령과 규범 중 받아들일 중요한 전통과, 개량하고 버려도 될 구습을 나누었을까요?
모두가 답을 알고 있을 질문입니다.
사라진 규범은 기독교도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고,
여전히 남은 규범은 기독교의 목회자와 지도자들을 물질적으로 혹은 권력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들 뿐입니다.
성서 특히 신약 성서의 예수의 육성을 통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마몬(재물, 돈)'에 대한 경고는,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한국의 개신교 목회자와 성도들에겐 별로 와닿지 못한 듯 합니다.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고 웃는 자녀의 경박함과는
차마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악이고 경박함입니다.
현대의, 한국의 기독교인은 어쩌면 위와 같은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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