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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책이다보니 완벽하게 분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 생각을 오래 하게 되었는데


어차피 완벽한 분석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테고, 내가 이러쿵 저러쿵 써놓은 것이 완벽할 리도 없고, 몇 년 후에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냥 되는 만큼 최선을 다해 써야겠다 싶다


우선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고 시작하겠다


이야기는 19세기 독일 프로이센 시골 지방인 호엔크레멘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에피 브리스트는 호엔크레멘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브리스트 가의 귀엽고 깜찍하고 상큼발랄 순수 큐티한 외동딸이다


유서 깊은 귀족 집안이라고 해도 귀족 중에서 딱히 거물인 것도 아니고, 가문의 고고한 역사에 질식하는 식의 전개도 없다


호엔크레멘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아름다운 에피는 17세의 어느 날, 39세의 인스테텐과 결혼하게 된다


인스테텐은 젊은 시절 에피의 어머니와 새콤달콤한 관계가 있었지만 (인싸들이 썸이라고 하는 그 정도) 에피의 어머니가 브리스트를 택하자 군대에 투신했고


이후에는 벼슬에 몸을 담아 진력하여, 상당한 출세가 보장되어있는 남자다 (에피의 어머니와 동향이며 동갑이다)


애초에 사랑은 없었다. 에피는 (본인이 직접 언급하듯이) 명예욕을 따라 결혼한다


에피는 인스테텐이 군수(혹은 관구장)로 일하고 있는 케신으로 이사가게 되는데


황량한 북부 시골 케신에서 에피는 따분하고 깐깐한 귀족들과 예의를 차려가며 교류해야만 하고


남편은 툭하면 귀엽고 예쁜 아내를 관사에 홀로 남겨둔 채 비스마르크를 접대하러 가버리고


관사에는 중국인 귀신이 나온다


이 중국인 귀신은 조그마한 서스펜스를 제공하고 퇴장하는데, 나중에도 까먹을 만하면 한 번씩 언급된다. 에피의 신세를 상징하는 혹은 에피와 인스테텐의 관계를 반어적으로 폭로하는 장치다


케신의 나이 많고 따분한 귀족들 중에 단 한 명 사람답게 생긴 이가 있었는데 이 자가 크람파스 소령이다


에피는 이 경박한 남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결국 크람파스의 끈질긴 유혹에 넘어가, 매일 밀회를 가지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스테텐이 승진하여 베를린으로 발령받게 되면서 두 사람의 비밀스런 불륜 관계는 조용히 끝난다


그리고 7년 후, 에피가 휴양을 위해 온천에 간 사이, 에피와 크람파스가 밀회 당시 나누었던 편지를 우연히 인스테텐이 발견한다


인스테텐은 물론 고민하지만, 단호하게 에피와 절연하고 크람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정당하게 살해한다


에피는 당시 '그런 부인들'이 흔히 그러듯이, 부모에게 가지도 못하고 일도 하지 못하고 (둘 다, 능력이 있어도 받아주지 않음)


부모가 보내주는 조촐한 생활비를 쪼개가며 베를린의 허름한 방구석에서 외롭고 처량하게 살아간다


어느 날 에피는 거리에서 인스테텐과 낳은 자신의 딸을 발견하여 딸과 만날 수 있기를 인스테텐에게 청원하는데


그렇게 몇 년 만에 재회한 딸이, 아버지에게 완전히 세뇌된 듯 딱딱한 태도로 대하자


에피는 크게 분노하고 이 때부터 병이 심해진다


에피의 병이 너무 심해지자 브리스트 씨는 '사회적인 관계'를 끊는 한이 있더라도 데려와야겠다며 호엔크레멘으로 딸을 데려와 요양시킨


에피는 나아졌다가 다시 도지기를 몇 번 반복하다 결국 죽는다




이렇게 사건을 줄줄 나열하니 정말 맛이 없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쓰려고 주요 조연이나 디테일한 사건과 장치들도 다 생략하고...


예를 들어 로즈비타라는 하녀가 있다


살 의지를 상실한 지경에 이른 것을 에피가 데려와, 오랫동안 쭉 모셨으며 에피가 혼자 살 때도 항상 곁에 있었다


병든 에피를 위해 인스테텐의 개 롤로를 불러주었고


인스테텐의 하녀 요한나와의 대비, 신교도적인 혹은 무신론적인 작품 전체 분위기와 반대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자주 강조되는 등 중요한 캐릭터다



어쨌든 읽어본 사람이 적을 것이기에 부득이하게 재미 없는 줄거리를 읊었다


에피는 왜 바람을 피우게 되었을까? 크람파스가 알파메일이라서? 그건 가장 쉬운 답일테니 보류하자. 크람파스는 잘생겼고 위트가 있지만, 인스테텐 역시 잘생겼다. 인스테텐이 따분하고 나이가 많긴 한데, 사실 크람파스가 몇 살 더 많다. 유일하게 할 만한 상대라서 했다, 라는 것은 현실이라면 있을 법할 지도 모르지만 이야기에선 그래서는 안 된다. 이야기는 현실이 아니다


에피의 불륜은 사회의 압박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된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목사/신부를 꼬시는 것과, 처절함의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에피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홀로 타지에서 남편의 부재와 통제를 동시에 겪어야만 했다. 인스테텐이 부재하면서도 동시에 통제하고 있다고 에피가 느끼게 된 이유가 바로 중국인 귀신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적한 것이 크람파스다)


인스테텐은 자신도 믿지 않는 중국인 귀신을 존재하는 것처럼 말한다. 여기서 인스테텐은 명백하게, 구태의연한 사회의 인습을 대표한다


에피는 사회와 함께, 사회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사회라는 것이 말짱 허위인 것이다. 그걸 알고도 빠져나갈 수도 없다


그래서 그것을 속인다. 즉 크람파스도 에피와 같은, 사회의 허위에 속아 빠져나가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크람파스에게는 -굉장히 클리셰적인- 늙고 추하며 질투심 많은 부인이 있다)


7년 후 공개되는 편지에 의하면 이 당시 에피는 크람파스에게 함께 외국으로 도망치자고 여러번 제안하지만 크람파스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이런 부분에선 영화 졸업의 엔딩이 떠오른다. 극히 낭만적인 신부 탈취 장면 이후 버스에 탄 두 사람의 얼굴은 대단히 어둡다. 에피와 크람파스가 도피했다면, 이 또한 그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게 사랑일까? 아니겠지. 모쏠아다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런 장면은 폰타네의 제니 트라이벨 부인에도 나온다. 나는 여자가 주도적인 행동을 하지만 남자가 거부한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둘 다 도망치지 못 하고 극복하지도 못하고 순응하여 갇힌 채다. 이게 중요했던 거다.


에피 브리스트든 제니 트라이벨 부인이든 마찬가지다.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두 연인은 맺어질 수 없다. 도망도 치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시도도 안 한다. 카라마조프에는 그렇게 도망쳤다 잡혀와서 정신 나간 부인이 나오고, 전쟁과 평화에는 여자를 낚아서 도망치려고 시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폰타네는 도망치는 시도조차 그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닌다. 에피가 상황을 모면한 계기는 인스테텐의 발령이다. 에피도 크람파스도 인스테텐도 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결국 개인은 사회에 대항할 수 없다. 7년 후 편지를 발견한 인스테텐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게 된 배경은,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더욱 명확하다.


글을 쓰면서 확실해졌다. 폰타네가 근대적 개인을 엄밀하게 조형하지 않은 채로 개인과 사회의 어중간한 화해를 그린 이유는, 개인으로선 사회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에피는 신과 인간과 화해하고 죽는다. 초반에 언급한 에피의 어설픈 명예욕, 그것이 화해를 막는 일종의, 사회에서 살기 위해 받아들이게 되는 저주가 아닐런지...


화해는 폰타네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인데 나도 여전히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 한 것 같다. 폰타네를 좀 더 읽어봐야 한다.


한편 사회를 거스르다 철퇴를 맞고 죽은 크람파스나, 죽은거나 다름없이 지내다 결국 죽은 에피와 달리, 구태의연을 대표하고 출세가도를 달리는 인스테텐 또한 극도의 허무와 고통 속에서 마지못해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서술은, 이 지옥에 가해자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왜 이렇게 폰타네에 끌리는지 자문해보다가 떠오른건데


1848년 2월 혁명, 그 실패 이후 정립된 질서 아래 폰타네가 그리는 독일 사회와


1968년 68 혁명, 그 실패 이후 정립된 질서 아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사회가


은근히 비슷한 것 같다. 뭐, 저 정도로 꽉막힌 세상은 아니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는데, 모든 건 상대적인 거니까. 먼가 구조적으로 비슷한 것 같다. 탈출구가 없는 갑갑함을 비슷하게 느낀다.


이 감상을 쓰면서 문학과지성사 판을 다시 빌려 같이 읽어보았는데, 문학동네보다 번역이 좋지 않다고 확실하게 말하기는 힘들겠다. 두 책의 번역 퀄리티는 비슷하다. 솔직히 둘 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독일어를 모른다. 전부 다, 한국어적으로 읽기 힘들고 어색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저 따라 읽기도 힘들 지경인 폰타네의 다른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폰타네의 경쾌한 반어법을 한국어로 좀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