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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하이트가 말한 것처럼


확실히 많은 사람들에게,


일단 감정적으로, 직관적으로 판단을 내린 다음


사후에 이성적 근거를 갖다 붙이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조너선 하이트가 또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공정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가 되느냐


그밖의 순수성, 권위, 충성 등등도 고루 중시하는 보수주의자가 되느냐에 있어


유전적인 요소들, 진화된 심리적 모듈들, 문화적인 요소들이 두루 영향을 미치긴 한다.


그래서 그러한 사회심리학적 사실들, 인간의 기본적인 취약성 등등을 알게 되면,


어쨌든 자기 의견을 고수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너~무 미워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조너선 하이트가 위와 같은 사회심리학 실험 결과들을 가지고


서로 다른 도덕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넘 미워하지 마세여~ 라는 말만 한 게 아니라는 거다.


해악 감소와 공정성을 엄청나게 강조하긴 하지만 순수, 복종, 충성심과 같은 요소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성에 대한 축소된 개념을 갖고 있다고 말하며 하이트는 자유주의자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고로 자유주의자들은 더 광범위하게 보수적 가치를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왜 그래야 하는가?


자유주의자들이, 특히 존 롤즈, 로널드 드워킨, 토마스 스캔론,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위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그냥 (객관적) 도덕의 기준에서 옳을 수도 있지 않은가?


왜 도덕적 판단에 있어 옳은 사람들이 그른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포용해야 하는가?


하이트는 객관적, 보편적인 도덕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후합리화하는 그런 '경향'이 있다고 해서


도덕이라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학문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할 순 없다.


그것은 극소수만이 리만 기하학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해서


리만 기하학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할 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 각각의 사람들이 느끼는 도덕적 직관들의 강렬함 정도에


임의적인 요소(유전, 환경, 문화 등등)들이 개입된다고 하더라도


도덕의 영역에서 사람들의 그런 직관 모두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가령 수학적 재능도 임의적인 유전적 소질, 어린 시절 환경,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어떤 사람은 더 수학을 잘 하고 어떤 사람은 수학을 더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수학적 능력이 불균형하게 분포되어 있고


그런 불균형함의 연유가 우연적인 것이라고 해서


수학적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수포자들의 수학 실력을 본받거나 그들의 엉성한 사고방식을 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정성을 더 잘 따지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재능을 타고나는 데 있어 온갖 임의적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들이 공정성을 따져야 하는 문제를 풀 때 그런 재능이 없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포용하려고 필요는 없는 거다.


조너선 하이트는 자신이 상대주의자가 아니라 다원주의자라고 말하긴 하지만,


한 사회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별개로


독립적 판단기준을 가지고 그 사회의 다수 도덕적 견해와 무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체계를 가진


객관적 도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덕 상대주의자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도덕'이 변해왔고,


도덕은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객관적일 수 없다고 떠들어대는.


그러한 도덕 회의론자, 도덕 상대주의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민열˙김도균, 『헌법논증이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이다.


위 책의 (56-58면.)에서는, 그러한 도덕 상대주의자를 흥미로운 대화문을 통해 아작내고 있다.


해당 대화문에 등장하는 한 도덕 상대주의자는


한때 미국 남부에서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았다고 주장한다.


도덕의 명제들은 어떤 물리적 실체를 갖고 있어서 관측 도구를 통해 객관적으로 그 진리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도덕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남부인들은 노예제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남부에서는 노예제가 옳다"(위의 책, 57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곡률이 없는 평면에서는 평행한 직선은 만나지 않는다는 글자가 적힌 자연적 물체도 없다.


당신의 주장에 따르면 기하학에 관한 진리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당신이 정말로 명제와 명제태도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애초에 나와 당신이 대화를 시작한 이유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당신과 나는 남부 사람들이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는


명제태도에 관한 사실 자체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책, 57면.)


조너선 하이트를 비롯한 수많은 '객관적 도덕에 대한 회의론자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가


바로 저것, 명제와 명제태도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이다.


예를 들어,


영철이는 미숙이만 보고 있고, 미숙이는 민철이만 보고 있고 민철이는 허공만 쳐다 보고 있는데


영철이는 결혼을 했고, 미숙이는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고,


민철이는 결혼을 안 한 상황이라고 하자.


이 경우, <결혼한 사람이 결혼 안 한 사람을 보고 있는 경우가 있다>라는 명제는 참인가, 거짓인가? 또는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답은 참이다. 왜냐하면 미숙이가 결혼을 했다면 미숙이가 민철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참이 되고,


미숙이가 결혼을 안 했다면, 영철이가 미숙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참이 되므로


두 가지 가능한 경우 모두에서 참이 되기 때문에 저 명제는 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저 문제에서 오답을 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 명제가 참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핵전쟁이 일어나 인류가 거의 전멸하게 되었고 지구상에 단 3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3명이 모두 저 명제, <결혼한 사람이 결혼 안 한 사람을 보고 있는 경우가 있다>가 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저 명제는 참이다.


즉, 한 명제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명제태도)와 그 명제는 다른 것이다.


하이트는 사람들이 도덕적 문제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온갖 임의적인 진화적, 문화적 이유로) 중시하는 가치들이


서로 다르다는 '명제태도'에 관한 실험 결과들을 가지고


객관적 도덕 명제 자체에 대한 회의론에 빠졌다.


그러나


예를 들어,


587345734*4577653 이 문제에 대한 답을 5초 안에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아 이 문제에 객관적인 답은다~ 라고 할 수는 없다.


콰인(W. V. Quine)이 말했듯이,


사람들이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수학, 과학을 비롯해


인간의 모든 지식 체계는,


잠정적 참(추후 다른 증거들과 상충하는 일이 벌어지면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명제들)의 지위를 지닌 신념들이


서로를 지지하는 그물망(web)이다.


도덕도 우리의 도덕적 직관들, 숙고된 판단들, 원리들을 정합적으로 짜맞춘 그러한 지식의 그물망인 것이다.


그러한 논리적 체계성을 가진 신념 체계의 명제들은 당연히 사람들의 이런저런 명제태도와 구별된다.


결국 조너선 하이트는 도덕 자체에 대해서는 개뿔도 모르고 있다.


히틀러와 그의 수천 만의 추종자들이 지구상에 나치 빼고 모든 인간을 다 죽여버렸다고 해도


<아리아인만 남겨두고 다른 인종은 다 쓸어버리는 게 옳다!>라는 그들이 공유하는 그 신념이 도덕적으로 옳은 게 되는 건 아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자가당착이기도 한 게


그의 말마따나


좌파 매트릭스, 우파 매트릭스, 아무개 매트릭스,


각자가 다 지들만의 매트릭스에 갇혀 있다면,


하이트도 지만의 매트릭스에 갇혀 가지고 지금 지껄이고 있는 거 아닌가?


지는 구름 위로 솟아 올라


좌파, 우파, 각 정파들을 두루 굽어 살피어


메타 입지를 잡고


<자, 내가 너희들 모두에게 바람직한 방향을 지도해주마!> 라고 선구자를 자처한다면,


다른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주장은 어느 한 매트릭스에 갇혀서 나온 게 아니라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하는 얘기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즉, <자유주의자, 좌파 너희들 매트릭스에 갇혀서 주장하고 있어!> 이런 말에는


<아닌뎅 나도 너처럼 매트릭스 빠져나와서 주장하고 있는데? 왜 너만 매트릭스 빠져나올 수 있어? 뭔 너만 용가리 통뼈야?>


이렇게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는 거다.


"(...) 국가 전체가 있고 이들이 구성원에게 더 나은 도덕적 행동을 원한다고 생각해보자.


도덕적 다양성의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이들이 목표하는 바를 명시해보면,


그것은 친사회적 행동의 '산출량'은 늘리고 반사회적 행동의 '산출량'은 줄이는 것이 될 것이다(해당 집단이 이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없이).


어떤 식의 도덕적 비전을 원하든 그것을 이루려면 높은 수준의 사회적 자본이 필요할 것이 거의 틀림없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왕수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4, 515면.)


조너선 하이트도 어떤 정파든 상관없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칙(친사회적 행동의 '산출량'은 늘리고 반사회적 행동의 '산출량'은 줄이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하이트 자신도 지가 '보편타당한 당위'라고 생각하는 바에 기대서 좌파, 우파 다들 좀 더 친하게 지내보자~ 라고 떠들고 있지 않은가?


존 롤즈, 로널드 드워킨, 토마스 스캔론과 같은 위대한 자유주의자들은


하이트가 좌파, 우파 막론하고 누구든 동의할 만한 원칙이라고 기대고 있는 원칙 이상으로 보편적이고 확실해 보이는


객관적인 도덕 원칙, <국가는 그 구성원들 각각을 모두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기초해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각각의 첨예한 쟁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포용하고, 양보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 대원칙을 위배하여 다른 구성원의 평등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헤헤 내 취향은 공평성이야~ 공평성이 딴 거보다 더 맛있쪙 순수성 퉤퉤 노맛 ~ ' 이러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하이트가 자유주의자들한테 조금이라도 포용, 양보, 재고를 요구할 참이면,


그들의 체계적 도덕적 논증 자체와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