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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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전의 세상에서 소속되었던 민족과 친척과 부모의 유산을 떠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어떤 절망과 의심과 회의가 기원 전 중동에선 최고로 발전한 도시에 살던 이를,
자신이 소속되었던 민족과 친척과 부모의 유산을 포기하고 황야로 나서게 했을지를 상상해 봅니다.
11장 뒷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듯, 당대 최고로 번성했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아브라함의 아버지였고, 겨우 정착한 도시 하란을 아브라함은 다시 떠난 것입니다. 기존 세계와 사회, 어쩌면 당대의 종교와 가치관에 대한 회의와 변화의 욕구는 최소 2세대 동안 계속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의 결단은 주말의 여행도, 새 집으로의 이사도 아닙니다. 그의 영혼을 울린 절대자의 언어가 지시하는 것은 그저 그의 생존을 보장해주던 모든 기반과의 단절과 목적지도 알 수 없는 이주, 막연한 미래의 축복일 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무모한 행동을 감행한 아브라함이 15세 소년이 아니라, 아내와 조카, '얻은 사람들'이라고 까지 표현된 많은 수의 사람들과 상당한 재산까지 책임진 75세의 노인이었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하란으로부터의 추격이나 충돌 없이 그곳에서 얻은 재산과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나올 수 있었던 점 등으로 미뤄볼 때 그들의 이주는 분명 불법적 행위 뒤의 도피나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당대의 인류 중에서 가장 고결한 도덕성과 양심,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10절부터 나오는 애굽에서의 일화는 그의 나약하고 겁 많은 면모를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이집트로 들어가기도 전에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자신에게 닥칠 위험에 먼저 겁을 집어먹고, 내 아내가 아닌 누이인 척 해달라는 요청. 일일 드라마 속 지질한 조연 같은 한심한 모습.
자신의 민족과 종교의 시조로 내세운 인간의 단점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묘사한 기록이 또 있을까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아브라함이란 인물이 가진 의미와 무게감을 생각해 볼 때, 2000년 가까운 세월의 필사와 재편집 과정에서도 이 이야기가 삭제되거나 변호되지 않은 채 전승되었다는 것도 여러모로 놀랍습니다.
왜 여호와는 이런 평범하고 겁 많은 인간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 혹은 성서 전체의 맥락을 따라가며 좀 더 고민해봐야 할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12장의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되새겨 봅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2절의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도 한글 번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והיה ברכה(헤예 브라카)', 즉 '너는 복이 되라' 혹은 '복이 될 것이다'라는 표현.
물론 많은 땅을 갖게 될 것이고 선택된 새로운 민족의 시조가 될 것이라는 약속도 있지만, 이런 물질적 부나 이익을 약속하는 존재는 조악한 신화나 민담 속에도 수없이 있습니다. 그들과 아브라함을 선택한 여호와의 차이점은 인간에게 많은 축복을 준다는 약속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인간을 '복' 그 자체, 축복의 근원으로 변화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점입니다.
한 인간의 존재 방식과 의미 자체를 뒤바꿔 외부로부터 오는 물질적 풍요에 의존하고 그에 만족하는 의존적 존재가 아닌, 아브라함의 시대에서 거의 천 년은 후에 등장할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한 것처럼 인간을 복의 근원, 생수의 근원으로 변모시켜 주겠다는 약속.
이런 변화와 상승에는 걸맞지 않는 더없이 평범한 인간에게 내려지는 존재론적인 축복. 당대 중동과 북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국가를 지배하는 파라오도 이 평범한 인간을 일방적으로 축복하고 보호하는 절대자의 권능에 복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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