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오는 달밤 길」
어머니가 급병이 나서, 나는 삼십 리 밖에 가서 계시는 아버지한테 알리러 산협길을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올 때는 맑고 밝은 달빛에 서리가 오는 쓸쓸키만 한 밤이었는데, 어느새 새벽녘인지 먼 마을에선 울기 비롯는 교교한 수탉 울음소리도 들려오고 있어, 나는 칩고 외로워서 아버지의 하얀 무명두루매기 안으로 들어서서 그의 저고리 한쪽 끝을 단단히 움켜잡으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는 또 뛰쳐나와서 땅과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두리번거려 보고 듣고 있었습니다.
무성한 갈대밭 위로는 문득 몇십 마린가 기러기 한떼가 끼르릉 끼르릉 하고 그 소리의 종성(終聲)인 'ㅇ' 소리를 여러 개의 종소리의 여운처럼 울리며 날아가고 있고, 또 내가 걷는 길 밑에 산협 강물은 남실남실 차있었는데, 아버지는 이걸 "참때로구나" 하셨습니다. 바다에 만조(滿朝) 때가 되어서 그 조류(潮流)가 산협의 강물을 떠밀며 몇십 리고 거슬러올라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 나는 어느새인지 치위도 외로움도 잊고, 이 모든 것의 구성은 아주 좋다는 느낌을 갖게 되어 있었습니다. '구성'이라는 그런 한자단어는 아직 몰랐으니까 그런 말을 써서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이날밤 내가 느낀 이 구성은 이 뒤에도 내가 사는 데 한 중요한 표준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만큼도 못한 것은 승겁다고요.
- 『안 잊히는 일들』(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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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열두 살까지의 기억을 형상화한 『안 잊히는 일들』 서두의 열여섯 편은 따뜻하기가 그지없다. <개울 건너 부안댁 감나무> <당음(당시)> <내 할머니> <처음 본 꽃상여의 인상> <만 십세> 등 요즘 말로 '예쁜' 시들이 많다. <당음(당시)>에서 고백되는 것처럼 이 시들은 대체로 머리가 크기 이전의, 관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시기로서의 유년기의 장면들을 그리고 있다. 미당 시에서는 의외로 고향인 전라도 사투리를 어투로 채용한 것이 드문데 여기서는 <꾸어온 남의 첩의 권주가> 등 여러 편이 '-라우'로 끝나는 사투리 말투로 씌어져 있다. 유년기 체험이 갖는 무구함을 강조하기 위한 표식이라고 생각된다.
아침이 밝아오는 무렵의 찬 길을 걸어가면서 막연하게 느낀 감각, 그 감각이 그 뒤의 인생 체험에서 한 표준이 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 위의 시 역시 이런 유년기 체험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시집의 전반부에서 유일한 산문시인데 상황에 대한 설명이 아주 자세해서 핍진함의 미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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