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알만한 사람은 아는 스티븐 킹의 대표작 '더 스탠드'.
수백 쪽 짜리가 장장 6권인 장편이며 전염병 아포칼립스적인 클리셰를 확립하고 또 가장 잘 썼다고 평가받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쓰려고 보니 나무위키에 잘 나와 있어서 거길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아주 짧게 쓰자면 치사율 99.7퍼센트의 바이러스로 인류가 대부분 죽고 일어나는 이야기다.
그럼 이제, 이 만만찮은 소설을 왜 읽게 되었는가?
한국에선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은 옛날 소설이고 영향력이 많다 한들 이제 와선 식상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 편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첫 권을 나름 재밌게 읽었음에도 나머지에 대해선 별로 미련 없이 잊어버렸다.
그렇게 거의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얼마 전에야 나머지를 읽어버렸는데, 첫째는 갑자기 긴 이야기가 읽고 싶었고 요즘 작가들을 읽자니 검증이 되지 않았기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래전 읽었던 1권의 느낌은, 이제 잘 숙성되어 그때와는 사뭇 달라진 내 입맛에 새콤한 식욕을 자극하는 것처럼 문득 떠올랐다.
넓은 미국의 국토를 배경으로 종횡무진으로 뻣어나가는 이 장대한 이야기가 떠오르니 책도 별로 안읽으면서 독서 불감증에 걸려버린 나는 오랜만에 입맛이 돌아 참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퍼지는 듯 하면서 응어리지고, 응어리지는 듯 하면서 끝내 피어오르는 이 이야기는 스티븐 킹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솔직히 밑도끝도 없이 늘어놓는 묘사들이나 처음에는 힙했지만 조금 질리는 나레이션 방식의 내면 묘사들이 항상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느껴진다. 그 힘은 작가 본인의 숙고에 의해서라기 보단 이야기 자체에 힘을 부여하고 작가는 멍에를 잡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프리-아포칼립스라고 할 만한, 전염병이 돌기 전 세상의 이야기다. 이게 내가 읽은 1권의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작가는 여러 인간군상의 모습을 교차하며 보여주는데, 이는 앞으로 펼쳐질 난리 속에서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에 깊이와 재미를 더해준다. 이토록 각양각색에, 그리고 지리적으로 떨어져있는 이 인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지, 어떤 식으로 이어지게 될 지 기대를 더한다.
그리고 핵심 인물인 다크맨의 등장도 인상깊다. 이에 대해선 따로 얘기하도록 하겠다.
둘째는 전염병이 돌고 난 이후 주인공들이 헤매는 부분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텅 빈 도시에 주인공만 남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클리셰는 이 부분에서 가장 진하다. 어찌 보면 가장 강렬하고 몰입감을 선사하는 부분인데, 여기서도 전환되는 시점들로 인해 독자는 그 분위기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어딜가든, 정말 세상 전체가 '거의' 죽어버렸고 인류의 마지막 호흡 중 하나가 바로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언제든 스릴 넘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이 클라이맥스는 아니지만, 흔히 말하는 '힘 빠지기 전'(이 소설에 경우 나쁜 의미는 아니다)이기도 하고 몰입이 쉬웠던 부분인지라 전반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혔다.
세 번째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다크맨과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부분이다.
텅 빈 건물의 숲과 끝도 없는 교통체증 사이를 터벅거리는 것만큼 몰입되지는 않지만,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의 초기 부분은 작가의 역량이 잘 발휘된 부분 같다. 작지만 타오르기 시작하는 희망과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잘 묘사되어 있다. 편의를 위한 캐릭터들과 진행을 적절하게 배치했고 입담도 볼만하다.
찔끔씩 나왔는 다크맨과 그 세력도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무슨 군대대 군대의 전투가 나오지 않는 것도 색달랐다. 흔히 말하는 선과 악의 싸움은 무력만이 아님을, 그리고 악이란 강대해 보이지만 결국 스스로조차 증오하며 파괴하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 스탠드'에는 이야기의 흐름속에서 흥미롭게 반짝이는 캐릭터들이 많지만, 역시 가장 흥미로운 건 메인 빌런 '다크맨'일 것이다.
초반에 그는 대단히 포스있다. 그는 환상적인(fantasy)존재이다. 20세기지만 마법을 부리고 행동은 예측할 수 없는 쾌활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허물 수 없는 카리스마로 무장한 존재이다. 묵시록을 모티브로 한 소설인 만큼 그는 시대를 초월한 악의 화신으로서 신화적인 존재감을 내뿜는다.
작가는 그를 단순히 나쁜 놈,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정도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악'이라는 개념의 화신으로서 묘사하려 노력했다는 점이 느껴진다. 그로 인해 99.7퍼센트의 인류를 죽인 바이러스도, 이를 만들고 관리에 실패한 미군도 아닌 이 다크맨이 진정 이 소설의 '악'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를 이루고 있는 무언가를 파괴하고 왜곡해 버리는 모습은 그의 영향력이 인격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정의될 수 없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끝도 모를 러브크래프트적인 무언가에 근간을 둔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다크맨은 자기가 왜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 존재로서 살아간다. 빌런의 서사란게 없고 어디서 태어난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그냥 그런놈이다.
이 양반은 스티븐 킹의 다른 소설에도 등장하는데, 여하튼 아주 악한이다.
꽤 재밌게 읽었다. 오래된 소설이라고 케케묵은 느낌도 없고 오히려 요즘 소설보다 잘 읽히며 세련되었다는 느낌마저 준다. 클리셰의 원조격이면서 틀에 박히지 않았고 고찰 또한 곱씹을 만하다. 필력 자체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병원에 입원할 일이 있거나 어디 오래 있어야 되면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첫 권을 읽고 더 읽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그냥 기다려도 괜찮다. 시장이 반찬인 때가 올 수도 있으니까. 초장편인 만큼 무작정 읽기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