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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영혼의 연금술>

 

길 위의 철학자는 무엇을 탐구하는가? 종교 전쟁, 마녀사냥, 역사를 바꾼 혁명들과 홀로코스트, 지금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시위들. 좋은 것들, 나쁜 것들, 뒤섞여있는 것들. 그게 무엇이 되었건 대중 운동은 위력을 갖추고 있다. 그 위력은 개인의 익명화를 필요로 하고, 필연적으로 개인이라는 존재를 묵살한다. 따라서 대중 운동의 과정을 가능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 자체가 개인이라는 정체성의 해체를 고발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에릭 호퍼는 대중 운동을 그다지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집단 역시 개인들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에서 개인에 대한 시선도 곱지 못하긴 매한가지다. 결국 인간은 추악한 존재이다. 자신들의 추악함을 끊임없이 잉태시키다 어느 순간 쥐떼처럼 모여들어 온 세상을 갉아먹고는 어느새 다시 쥐구멍으로 숨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인간은 역사를 반복한다. 호퍼는 아포리즘 연작을 통해 대중 운동의 범위를 폭넓게 규정하고 개인이 어떠한 이유로 집단의 일부로 전락하는가를 추적한다. 인간은 왜 쥐떼로 전락하는가? 이것이 <맹신자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현실을 비하하는 기질, 몽상에 빠지는 습성, 습관적인 증오심, 남 하는 대로 따라 하려는 경향, 현혹되기 쉬운 경향,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려는 경향을 비롯하여 극심한 좌절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다양한 현상은 단결의 동인이자 무모함을 부추기는 배후다.”

 

좌절한 사람들은 이렇듯 현재를 비하함으로써 막연하게 평등 의식을 얻는다.”

 

대중운동이 지지자를 끌어들이고 지키는 것은 강령과 약속이 강력해서가 아니다. 대중운동이 그들의 불안과 쓸쓸함, 무의미한 존재감에서 피신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이 사무치게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 깊고 기쁨 충만한 전인적 공동체 안에 그들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정말 쥐떼에 불과한가? <맹신자들>에서 대중운동의 표면과 그 근원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비루함과 추악함을 포착했다면, <영혼의 연금술>에서는 극단화되는 개인의 자기 혐오를 끈질기게 집어낸다. 호퍼는 이 책에서도 곱지 못한 시선을 견지하고 있으나 그 비판성은 맹신자들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영혼의 연금술>에서 느껴지는 비판적 태도는 그저 표면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 비판성을 영혼과 정신의 작동 기제를 객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입구로 보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입구를 지나면 일종의 과장법으로 도출된 결과들이 기어코 단순한 역설에까지 도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절제된 표현으로 명료하게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고는 과장하는 과정이다. 과장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주로 생각하거나 칭찬하기를 꺼리는 태도에 붙이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동기에 따라 친절한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친절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 친절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필요한 요소는 기만과 악의를 통해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서 잠자고 있는 품위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사고는 의견의 불일치에서 시작된다.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뜻이 맞지 않을 때 시작된다.”

 

행복의 추구야말로 불행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영혼의 연금술>은 그 제목처럼 영혼의 화학적 상호작용과 그 결과물들을 탐구한다. 이 책의 관심사는 영혼의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 만들어내는 금이다. 인간의 영혼은 쥐떼를 만들어내기도, 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바꿔말해 호퍼는 영혼의 존재를 전제한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시작된 인간의 타락, 하나님을 향한 첫 번째 불평, 그 이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력과 의심, 혐오의 역사들, 전쟁과 평화, 그럼에도 이어져 온 인간이라는 종. 단세포의 삶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온 영겁의 시간은 진화를 형성하고 사회적 동물이라는 종을 넘어 종교, 문화, 사회, 도시, 경제를 만들어낸다. 이 사회학적 개념들은 이제 인간종 위에서 자생한다. <진화하는 언어>에서는 언어를 제스처 게임이라 선언하며 언어 또한 오로지 문화적으로 자생하는 시스템임을 그려낸다. 언어는 뇌 안에 있다기보다 다른 층위에서 존재한다. SF 작가인 테드창은 단편 <>에서 자아의 토대를 찾으려 자신의 전자 회로를 해부하는 로봇 인간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해체된 기계 뇌 안에 있는 것은 전기와 공기의 흐름 뿐이었다. 그럼에도 자아는 존재한다. 도대체 인간의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자아는 생물학이 아닌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로버트 맥키는 <다이얼로그>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쾌히 밝힌다.

 

과학은 의식을 신체에 묶어두지 못하고 철학은 의식을 형이상학에 묶어두지 못하지만, 예술가는 어디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예술이 휘파람을 불면 통통 튀어오는 강아지처럼 자아가 뛰어온다. 이야기꾼이 보기에 자아는 주관적 영역의 늘 같은 자리에 둥지를 틀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머물고 자란다. ... 망상이든 아니든 자아의식은 우리 인류의 본질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생물학, 심리학, 사회문화적 층위와도 다른 어떤 층계에 존재할 것이다. 호퍼가 <영혼의 연금술>에서 보여준 것처럼, 영혼의 작동 방식은 존재론적이며 변증적이기도 하다. 폴 오스터가 <뉴욕 3부작>에서 그려내고 있듯이 인간의 정신은 이 세계에 참여해야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참여함으로써 세계를 지탱한다. 이 피드백 루프 속에서 영혼은 하나의 층계를 형성하고 그곳에 존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혼은 자생한다.

 

어떤 영혼의 천부적인 자질을 알고 싶을 때, 불만을 창조적 충동으로 바꾸는 능력을 측정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혁명가 못지않은 불만을 품고 있다. 하지만 똑같은 불만으로 각각이 만들어내는 부산물은 정말 판이하지 않은가!”

 

길 위의 철학자라는 별명은 그의 출신을 말해줌과 동시에, 문제의 원인이 되는 사회윤리적 지점들을 에둘러 비껴가는 건물 안의 철학자들을 전제한다. 에릭 호퍼는 정말 직설적이다. 그의 과장되고 직설적인 아포리즘은 건물 안 철학에 대한 불만을 창조적 충동으로 바꿔낸 결과였을까? 결국 호퍼는 자기 영혼의 금을 연성해낸다. 그리고 두 개의 상이한 탐구의 방향. 인간은 어떻게 쥐떼로 전락하는가?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금을 만들어내는가? 그 외에도 호퍼의 여러 저작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올 것이다. 이 뿌리 없이는 아무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전제이다.

 

원죄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우리 내면에서 영원히 깜빡이는 악의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원죄를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여러 문제를 다루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