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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장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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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과 사래라는 이름의 뜻은 각각 '훌륭한 아버지'와 '나의 귀부인'이었습니다. 


17장에서 여호와는 이 늙은 부부에게 본래의 이름보다 보다 보편적인 새 이름, 많은 무리의 부모라는 의미의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새 이름을 줍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은 두 사람. 


이어 아브라함은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세 천사를 손님으로 맞이해 후하게 대접하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여호와를 만류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우선 손님을 정성껏 접대하는 인류 공통의 풍습에 대한 문자적 기원이 인상적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 속에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속에도 여행객(제노스)에게 최선의 편의와 보호를 제공할 의무(제니아)를 거의 사회 전체가 강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역지사지의 지혜이기도 하고, 여행이나 미디어가 일상적이지 않았던 시대의 여행객은 다른 지역의 상황이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귀중한 창구였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많은 성서 연구자들이 골몰하는 주제인 '아브라함은 세 명의 여행자가 여호와와 그의 사자라는 것을 알았느냐, 몰랐느냐'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것보단 이어지는 19장의 맥락으로 보면 이 일화를 삽입한 진짜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아직 소돔에 사는 롯도 같은 손님을 환대하지만 19장의 소돔 백성은 손님들을 끌어내어 성적인 폭행을 하려 하고, 이는 잠시 후 벌어질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정당화할 만한 충분한 대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부분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오랜 갈망이 마침내 구체적으로 이뤄지는 시기입니다. 아브람은 99세가 되고 아내 사래 역시 고령으로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20년 이상 아브라함과 사래를 마냥 기다리게 한 여호와는 그들이 아들을 얻을 상식적인 조건과 희망이 깡그리 사라진 후가 되서야 아들을 주겠다는 구체적 약속을 합니다. 


소돔 왕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기 싫어 그가 허락한 전리품을 거절한 아브람을 묘사했던 창세기의 저자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여호와의 전능함을 과시하기 위한 빌드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를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겐 완벽하게 포기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로소 역사하기 시작하는 신의 섭리와 능력도 믿게 하는 장면일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마음을 굳힌 여호와를 붙들고 가망 없는 논쟁, 사실상의 생떼를 쓰는 아브라함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신 앞에서 소돔 성 안에도 45명, 40, 30을 이어 10명의 의인이 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아브라함은 정말로 자기 가족과 민족을 뛰어넘어 타락하기 쉬운 인류 전체를 사랑하고 변호하는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이름에 걸맞아 보입니다. 


그보다 전에, 25절에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 는 것이 맞지 않느냐며 항변하는 모습이 더욱 이채롭습니다. 인간이 절대자에게 두 번이나 '부당하다'라는 표현을 쓰며 그를 비판하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듯 세계의 규율 그 자체인 존재 앞에서 '정의'를 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의 논쟁은 한참 후에 등장하는 '욥'의 그것처럼 논리 및 언어적으로 화려하진 않으나, 그 깊이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욥은 궤변으로 가득한 신의 억지를 수용하는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신의 행위와 판단에도 부당함와 부정의가 있을 수 있으며 인간도 그것을 따져 물었습니다. 이는 그의 후대를 자처하는 모든 이들이 마땅히 따를 가치가 있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