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장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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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천사는 소돔으로 향하고 롯은 삼촌 아브라함처럼 그들을 맞이해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날 밤, 소돔인들은 롯의 집에 몰려와 손님들을 성폭행하려 하고 롯은 그들을 만류합니다. 파국 직전, 신의 사자들이 소돔 백성의 눈을 멀게 하고, 롯에게 성 밖으로의 탈출을 지시합니다. 롯의 아내와 딸들은 이 명령을 따르지만 딸의 약혼자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길 뿐입니다. 한숨도 자지 못한 깊은 밤, 롯의 가족은 소돔을 벗어나 인근 소알성으로 피신하고 그곳에 들어설 때 일출과 함께 신의 분노가 유황과 불의 형태로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집니다.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신의 자비없는 심판을 목격한 롯과 딸들은 공포에 질려 성이 아닌 산으로 피신합니다. 거기서 남편도 대를 이을 아이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조바심에 롯의 딸들은 아버지를 상대로 근친을 저지르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구약 성서의 시대 내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 민족의 시조가 됩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 숨가쁘고 독자마저 분노하게 하는 서사를 통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방인들과 섞여 사는 삶이 얼마나 위험하며 그들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죄를 짓는 인간들인지를 강조하려 했을 것입니다. 더불어 현대 인류의 눈에도 신기한 소금호수인 사해와, 중동 전체처럼 사해 근방에서도 볼 수 있는 유전에서 비롯된 역청(천연 아스팔트) 등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을 이용해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의 엄격함과 가차 없음을 보여주려 했을 것입니다.
끝없이 자신들보다 더 악하고 더 심각한 죄를 짓는 누군가가 있어야, 혹은 그들을 만들어내야 자신들의 올바름을 자각할 수 있는 상대적 선민의식. 하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롯의 삶도 아브라함 못잖게 고결해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밖에서 최소 수 백에서 수 천이나 될 유력한 무리의 우두머리로 살며 본인의 신념과 신앙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롯은 현실적 이유로 죄가 일상인 소돔 성에 살면서도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도덕적 신념과 신의 사자를 알아볼 정도의 신앙을 유지했죠. 성욕에 눈먼 소돔 백성에게 자신의 딸들을 내어주겠다던 그의 말이나, 만류하는 롯을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한다며 비난하던 소돔 백성들의 말은 평상시의 롯의 행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보수적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아들을 낳을 것, 고통이 끝나고 평화와 구원이 올 것, 이스라엘의 고통을 끝낼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날 것' 같은 구절 수 백 개를 모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단어적 유사성에 기인한 예언이 모두 사실이라면 롯의 서사는 그 예언들의 윗길에 둘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어 몇 개가 일치하는 구절을 모두 예언으로 보는 조악한 논리에 비한다면, 롯의 삶 즉 예수 드리스도처럼 죄악 뿐인 인간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구원하고 설득하려 노력하다 그들에게 핍박받고 쫒겨나 큰 고난을 겪었다는 서사는 거의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의 완벽한 리허설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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