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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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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 정리를 위해 산책을 한다. 나서기 전에 정리하고 싶은 주제를 정하지만 걷다보면 어느 순간 곧잘 공상에 빠지곤 한다.


어제는 사후세계에 대한 옆길로 빠져들었다. 사후세계는 대체 어떤 세계일까? 내가 죽고 나면 이 세계에서의 기억은 모두 잃은 채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하는 걸까? 아니면 영혼을 싣는 버스를 타고 망자들의 세계로 가게 될까?


후자에 대한 망상에 더 끌렸다. 망자들의 세계로 가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보통 천당과 지옥이라 불리는 좋은 곳과 나쁜 곳으로 나뉘어 있을까? 정의란 게 살아있다면 응당 구별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분명 심판관이 있을 터, 그 심판관은 나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까?


하지만, 세계의 온갖 부조리가 있다면 그 세계도 부조리가 있다. 심판관에게 망자에 대한 판결을 위한 기초자료를 정리하여 주는 비서가 있겠지. 하지만 그에게도 휴식은 필요한 터, 어제 휴가 받은 비서가 진탕 술을 들이키곤 음욕에 빠져 동틀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곤 부랴부랴 오늘 심판을 위해 출근한 것이다. 뭐 놀랍지도 않지만, 하필이면 나의 존재에 대한 정보를 기재한 문서만 잃어버린 것이다!


나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을 본 심판관은 집게손가락으로 눈썹을 쓰다듬으며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세계에 존재했던 게 맞습니까?”


아, 내가 세계에 존재했던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증명하지? 말 그대로 좆됐네. 아니 제가 세계에 존재하다 죽었으니 이곳에 온 것 아니오?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대체 이곳에 어떻게 왔으리오 하고 반박해보지만 심판관에겐 씨알도 안 먹힌다.


“저는 오직 증거로만 판단합니다. 당신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증거를 대세요.”


고개를 돌려 통과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그들은 너무나 즐거워보였고 오히려 죽기를 잘했다는 듯 서로 함박웃음을 지어댔다. 나도 저쪽으로 가 같이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었으면... 그런데 어떻게 가지? 갈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무엇이지?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입증하지?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한 가정의 파탄과 전쟁의 여파로 헤어져 버리게 된 쌍둥이 형제 클라우스와 루카스의 이야기다. 전쟁 속 상황에서 가장 긍정적인 가치는 물론 생존이지만 살아남았으면서도 분명 죽은 것만 못한 삶들도 있다.


서로를 너무나 그리워하면서 비참하게 현실을 살아나가야만 했던 클라우스와 루카스 형제가 그런 삶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어느 것도 사랑할 수 없는 채로 서로에 대한 그리움의 그림자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그리움을 각자 글로 써내려간다.


이 소설은 인물의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감정을 추측을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주인공 외의 입체적인 인물들을 주목해보면 루카스의 욕망을 추측해볼 수 있다. 오직 사랑받는 것만을 꿈꾸는 언청이, 꼽추에 불편한 몸을 가졌지만 역시 사랑받는 걸 간절히 바라는 마티아스, 자신의 인생을 글로 남기고 싶어 하는 빅토르까지.


루카스는 어린 시절 헤어진 가족들로부터 받았어야 할 사랑을 애원하고, 자신의 피 끓는 고통을 써내려간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뿐이었으므로. 그는 빅토르를 빌려 말한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 것 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루카스는 잊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부르짖으며 자신의 흔적들로 형제를 찾아 나선다.


물건을 자주 바닥에 떨어뜨리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물건이 떨어지면 어느 한 부품이 떨어져 나간다. 그 부품은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숨어버린다. 그럼 나는 온전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물건을 보며 이런 고물떼기는 필요 없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부품을 되찾길 바란다.


루카스가 잃어버린 부품이었다면, 그 자리에 남아 온전히 책임을 감내하는 건 오로지 클라우스의 몫이었다. 클라우스는 해체돼버린 가족, 특히 정신적 상처가 깊은 어머니의 히스테릭을 받아내며 그 자리를 지킨다.


그를 설명하는 단어는 남의 입을 빌린 ‘비관주의’ 시인란 표현뿐이었지만 그 네 글자에서 루카스를 잃어버린 사건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인생은 무의미하며, 고통스러운 것이고 비-신의 악의가 만들어 낸 이해 불가능한 발명품으로 여긴다.


상처의 그림자가 그리움의 그림자를 삼킨 뒤에서야 루카스는 드디어 클라우스를 만난다. 루카스는 자신의 메모를, 자신의 삶과 인생의 흔적을 클라우스에게 전한다. 클라우스는 끝까지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역시 누구보다 루카스를 그리워했다. 클라우스는 루카스의 삶과 인생을 읽어보곤, 이어진 빈 페이지에 자신의 삶과 인생을 이어 붙인다. 그럼으로써 드디어 루카스의 삶과 인생의 흔적더미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클라우스의 삶과 인생 역시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루카스가 던지는 삶의 질문에 클라우스가 자신의 삶으로써 응답함으로써,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다시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존재 간의 불멸의 결합이지만 이런 정신적 결합은 인물들의 비극적인 육체 행위와 간극이 벌어져 더욱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정말 이 간극이 곱씹을수록 더 좆같아지기 때문에 손꼽히는 수작이 아닐까 싶다.)


**

내가 무언가 과거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무언가 지금 존재하는 사실을 확인했다 해도, 과거와 현재 사이 인식 못한 그 시간동안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간극의 틈에 대한 대처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할지 우리는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하루 전날 부랴부랴 마치고 했던 그 작업. 방학식 때 존재했던 내가, 개학식에도 분명 존재하는 내가. 방학 동안에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방학숙제.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씀으로써 나는 그간의 존재를 증명한다.


더욱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살펴볼 수 있듯 글쓰기와 읽기는 시간을 넘나들며 서로를 결합시켜 준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말한다. 읽는 사람은 읽는 시점과 상이한 시점에 쓰인 흔적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타인의 존재를 느낌과 동시에 나의 존재도 느낀다. 그리고 읽는 자는 곧 쓰는 자가 됨으로써 존재를 말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공간은 하나로 통합된다. 그렇게 세계가 된다. 세계를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나는 살아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읽는다, 읽어야만 한다, 쓴다, 써야만 한다. 거대한 사상 앞에 초라해질지라도, 초라하기 때문에 엄두가 안날지라도, 어떻게 시작할지 막막하더라도, 글을 관통하는 기본 아이디어가 미숙하고 허접할지라도, 표현과 비유, 문장이 후질 지라도, 단순한 일차원적 감상에 지나지 않더라도, 쓰고 있는 그 순간의 나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것이 누군가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라는 부조리한 요구에 대한 존재의 유일한 진실이자 삶의 흔적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