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종(鐘)이야 될 테지, 되려면 될 테지
예 울던 대로 높다라이 걸려서
여기 갈림길
네 갈래 갈림길
해도 저물어
땅거미 끼는 제
종이야 될 테지, 될려면 될 테지
깨지면 깨진 대로 얼얼히 울어
자네 속 몰라
애탈 뿐이지
애타다가는
녹아갈 뿐이지
일천 년 자네 집 문지방에 울더라도
종이야 될 테지, 되려면 될 테지
젊어, 성(城)둘레
맴돌아 부르다가
금가건 내려져
시궁소릴 할지라도
종이야 될 테지, 되려면 될 테지
종이야 될 테지, 되려면 될 테지
- 『신라초』(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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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는 『천지유정』에서 충격적이기 짝이 없는 고백을 하고 있다. 『신라초』 시절의 시를 쓰던 무렵 여대생 한 사람을 한동안 짝사랑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케도 그 연정을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도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독자들은 자신을 죽일 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자서전이니 안 쓸 수도 없지 않겠냐고도 털어놓고 있다. 이 짝사랑 과정에서 생산된 것이 위 시집의 4부에 실린 <사십>과 몇 편의 <무제>들이다. 이들 중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은 '하여간 난 무언지 잃긴 잃었다'는 구절로 허무감을 토로한 세 번째 <무제>이지만 위의 두 번째 <무제> 역시 이에 준하게 비슷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관념적인 부분이 확 눈에 띠어서 그렇지 『신라초』에는 의외로 전통적인 어투를 활용한 작품들이 몇 편 보인다. 이 시는 두 가지 형태의 연을 써서 반복적인 구성을 하면서 동시에 문구를 조금씩 바꾸어 지루하지 않은 흐름을 갖고 있다. 서정주의 시에서 소리를 내는 종의 이미지는 <행진곡> 이후 꾸준히 등장하는 것인데, 시인의 마음 상태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내가 종이라면, 내 꼴이 비참하더라도 종은 종이니 종소리를 내기는 낼 것이다. 이를테면 '너 없이 살아도 멀쩡히 숨은 쉬겠지만'과 같은 가요 가사를 떠오르게 한다. 그만큼 보편적이지만 그만큼 조금은 유치한 면도 있기는 하다는 말이다. 반복하지만 사랑 노래를 시로 쓰는 것의 어려움을 다시금 절감한다.
진짜 글은 잘쓰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