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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장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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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사라는 아들 이삭을 얻고 웃습니다. 여호와와 그의 사자들이 육체를 입고 내려와 아브람과 대화할 때, 여호와가 했던 '아들을 낳을 것이다'란 약속을 듣고 사래가 보였던 불신의 웃음이 드디어 행복의 웃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웃음은 배제의 웃음이고 배제된 이들이 흘릴 눈물의 시초가 됩니다.


앞선 16장에서도 사래에 의해 강제로 아브람과 동침해 임신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가 여호와의 사자의 도움으로 돌아온 여종 하갈과 서자 이스마엘의 입지는 이삭의 출생으로 더 불안해집니다. 16장의 추방은 사래의 진심이라기보다 시쳇말로 '기강'을 잡기 위한 연출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이 '젖을 떼'었으니 영아 사망률이 가장 높은 위험한 시기는 벗어났습니다.


'많은 민족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얻고 이삭을 낳은 후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라던 사라는 잠재적 경쟁자를 물어 죽이는 짐승 같은 적의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다시 내쫓습니다. 소극적으로 '근심'할 뿐인 아브라함의 모습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이른 말을 다 들으라'고 충고하는 여호와입니다.


이렇듯 창세기는 도덕적 딜레마를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내 앞에서 완전하라'를 요구하는 신이 왜 이러한 배제를 용인하는지,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동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사라의 웃음은 하갈과 이스마엘 즉 아랍인들의 눈물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웃기 위해선 누군가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것은 현실 속 몇 안 되는 확고한 진리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경제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폐쇄된 생태계인 행성 혹은 사회의 제한된 자원과 재화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제와 경쟁의 구도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마스 전쟁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현대 물질 문명의 풍요와 안정 역시 국가와 자본이란 주체가 행한 압도적이고 세련된 배제의 결과물입니다.


선진국의 소비자들이 자라, 망고, 유니클로 등의 매장에서 싼값에 잘 디자인된 의류를 소비하며 짓던 웃음은 2013년 방글라데시의 라나 플라자라는 불법 증축된 건물에서 저 브랜드의 옷을 만들던 노동자 1129명의 사망자의 눈물을 불러왔습니다. 물론 직접적 책임은 붕괴 위험을 사전에 알았음에도 무시한 빌딩주와 사업장주들에게 있겠지만, 인과관계를 정확히 따진다면 노동착취의 가능성을 막연하게나마 의식하면서도 무관심했던 소비자에게도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습니다. 배제와 그렇게 배제된 범위 밖의 타인 따윈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무관심이 불러일으키는 비극과 죄는 아브라함의 시대나 현대나 여전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이 서자를, 나아가 자신이 자각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전 인류를 배제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대목에서 놀라운 점은 창세기의 저자가 이러한 배제의 논리를 단순히 수용하지 않고, 이 안에 내재된 모순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 비법은 사건을 기술하는 저자의 태도입니다. 그의 포커스는 사라의 가족보다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비극에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추방 전 사라나 아브라함의 입장은 '이삭을 놀리는지라',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등 대강 뭉뚱그리는 서술로 표현된 반면, 추방 후 하갈의 모습은 클로즈업으로 촬영한 듯한 생동감과 절절함이 넘칩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우니'


맹자의 말처럼 측은지심을 타고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아파할 광경입니다.


창세기에서 자꾸만 등장하는 어떤 불일치, 즉 도덕적 기준의 차이와 변화는 독자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내 앞에서 완전하라'를 요구하고 두 번이나 버려진 하갈과 이스마엘을 챙기는 신. 반면 카인이나 아브라함의 명백한 비도덕적 행동을 방관하거나 심지어 정당화하는 신. 이런 변덕스런 신의 인도를 받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족 300명 남짓의 병력으로 중동 지역의 왕들과 싸워이긴 후, 그에 비한다면 족장에 불과한 아비멜렉에게 또다시 아내를 빼앗긴 아브라함. 여호와의 말꼬리를 붙잡아서라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으려고 발버둥치다가도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여종을 두 번이나 내쫒는데 동의하는 아브라함. 그나마 진심으로 내쫒을 때 그가 하갈에게 챙겨준 '떡과 물 한 가죽부대'가 그의 양심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히브리어 원어로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 중 다수는 창세기 속 신에 대한 명사가 엘로힘, 엘, 야훼 등으로 다양하고, 사용 시기가 달랐던 어휘나 문체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창세기가 상이한 문서들을 편집한 것으로 봅니다. 저는 위와 같은 도덕적 기준의 혼란과 배제되는 이방인에 대한 연민과 가책도 모세 1인이 구약 도입부의 5경을 모두 작성했다는 어리석은 아집에 대한 확실한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다양한 시각과 모순의 공존은 창세기가 불멸의 가치와 시의성을 갖게 하는 핵심이고, 그 다수의 저자, 혹은 1인의 편집자가 신과 신앙과 죄에 대해, 이방인이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인류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산 증거이며, 자신이 답을 내리지 못한 신앙과 도덕의 딜레마의 바통을 후대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안에는 극단적인 흑백의 판정으로 살아남고 구원받을 자와 버려지고 멸망할 자를 가르는 시선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들뿐만 아니라 보편 인류 전체를 포용하고 구원하길 바라는 보다 넓은 시야의 시선,

마지막으로 신에게 완전히 버려지고 배제된 이들에게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 동정심은 물론 가책까지 느껴지는 시각으로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듯 축복하는 시선이 복잡하게 혼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창세기의 저자가 남긴 바통은 배제된 자들의 선혈이 흐르는 2024년의 현실 위에 여전히 버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