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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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 이야기와,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해 신이 요구하는 수준의 절대적 믿음을 보여준 것이라는 해석은 반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서술 상의 특징은 디테일과 생략이라는 상반된 기법으로 독자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내면의 갈등을 생생하게 상상하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나무를 쪼개고, 죽인 아들을 불태워 신에게 바칠 산을 멀리서 바라보고, 산 아래까지 동행한 종들에게 곧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는 거짓말 혹은 믿음의 대답을 하는 그의 외면은 상세하게 묘사되지만 내면의 갈등은 암시조차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3일이 넘는 여정 동안 불평 한 마디 없이 아버지를 따라 온, 100세에 얻은 사랑스러운 아들이 입을 열어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
어차피 둘 밖에 없는 광야의 산길. 침묵 속에서 불과 칼을 들고 걸어가는 스산한 아버지의 모습. 굳이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쓴 것에서는 어린 이삭의 불안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참혹한 생각들에 빠져 있던 아브라함에게 아들의 이 부름이 어떻게 들렸을지 상상해 봅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당황한 나머지 뱉은 뻔한 대답 같기도 하고, 불안해 하는 아들을 안심시키려는 배려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많은 목회자들이 관성으로 설교하듯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의나 이삭의 부활 혹은 차남을 잉태하게 하실 것을 믿었다고 해도 저렇게 묻는 아들 앞에서 태연할 수 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여호와가 지정한 죽음의 자리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을 결박합니다. 이 준비 작업의 세 단계는 당연한 순리라는 듯 한 문장 안에 나란히 서술됩니다. 제단을 완성한 후 자신을 묶는 100세 아버지의 손길을, 사리분별을 하고 3일 걸리는 여정에 동행할 정도로 나이를 먹은 이삭이 피했거나 저항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신뢰. 절망의 끝에서 얻은 아들에게 아브라함이 어떤 아버지였는지 쉽게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여호와는 자신과 아브라함, 혹은 인류와의 관계도 이 부자처럼 살해조차 감내할 수 있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도 같습니다. 또한 아무 죄 없는 속죄양이라는 히브리 민족의 유독 예민한 죄 의식에서 비롯된 독특한 이 상징은 히브리 민족 자체와 후일의 십자가 위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집니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시험이고 연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옹졸한 신의 형벌 앞에서 강조되는 프로메테우스, 시시프스,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들처럼.
이렇듯 부조리를 감내하는 인간 영웅의 당당함에 대비되어 드러나는 것은 신의 불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내린 고통 속에서도 당당한 그리스 영웅 앞에선 너무 인간다운 신들의 초라함이 강조됩니다. 불을 얻고, 죽음을 극복하고, 남편의 불륜의 결실인 주제에 올림푸스에서 회자될 정도의 업적을 쌓는 인간의 가능성과 도전을 두려워하는 옹졸한 신들.
외동 아들을 도륙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방식으로만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신 역시 크게 달라 보이진 않습니다.
물론 이 대목이 여호와의 옹졸함과 더불어 인간의 내면까진 들여다 볼 수 없어서 천륜을 어기는 살해 지시로 확인해야 할 정도로 전능하지 못함을 증명한다고 해석하는 것 역시 제가 보기엔 온당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제가 여러 번 감탄한 바 있는 대단한 깊이와 수준의 통찰을 보여준 창세기의 저자들 역시 절대자에 대해서는 제한적 인식을 가졌다는 것을 읽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론, 플로베르처럼 세심한 외면 묘사로 아브라함을 미친 광신자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과감히 생략된 내면 묘사를 통해 그의 애끓는 아버지로서의 심정을 독자에게 상상하게 하는 서술기법은 언뜻 보면 야만적인 이 이야기의 완성도와 다의성을 끌어올립니다. 히브리 민족 안에서 오래 구전되어 여타 민담처럼 집단 창작되었기 때문일까요? 잊을 만 하면 존재를 드러내는 놀라운 성찰력을 가진 저자의 단독 창작일까요? 정답이 무엇이든 확실한 것은 이 시대 저자들은 아직 신보단 인간을 더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광활한 하늘이라도 협소한 물 웅덩이에 반사된다면 딱 그 넓이 만큼만 포착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한 절대자에게도 한계는 있습니다. 절대자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므로, 자신을 마주한 인간의 이해의 넓이 만큼만 포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진자 잘알이네...
인문학적 해석으로는 정말 유식하시고 깊으시지만.. 종교적 해설로는 잘 모르겠어요. 인간의 관점에서만 보시지만 성경은 사람이 쓴 소설이 아니라서요..주체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소설이라면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읽는 것이구요. 그래도 응원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문학으로 성경을 대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최적인 글이라는 거잖아?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사실 이 독후감을 쓰려고 마음 먹었을 때 떠올린 전체의 제목은 '이성으로 성경 읽기' 였습니다. 저는 현재 불가지론자이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이성 역시 그가 부여해 주신 것이고 순전한 신앙과 믿음 만큼이나 그에게 닿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저는 방금 말씀하신 제 '인간의 관점'과 대치되는 '신의 관점'을 기존 신앙인들이 갖고 있다는 확신에 대해서도 큰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의견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기독교인은 아닌데 인문학적 소양을 위해 성경을 읽고싶다"라는 글이 꾸준히 올라오는 독갤에 알맞는 글인 것
그렇군요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신의 존재에 대해 궁금하셔서 읽으시는 거라면 성경을 쓴 신(기독교의 관점에선 성경은 사람이 지어서 적은 책이 아닌, 하나님의 성령으로 사람이 받아 적은 책입니다) 의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좀 더 깊은 이해가 있으실 것 같았어요. 인문학적으로 정말 재밌고 유익하게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적, 종교적 관점이랑은 많이 달라요.. 그래도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벨루가님의 관점에서도 제 삶과 경험, 이성 역시 신의 섭리 안에 조성된 물 웅덩이일 뿐이겠죠. 거기에 비친 성서와 신의 모습을 잘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진짜 지랄 자제좀
최피터님의 경험은 제가 감히 뭐라 할 수 없는것 같아요. 사람의 경험은 다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믿게 되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길 바라는 마음은 있네요. 비웃으며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제가 저의 삶을 통해 느낀 신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요. 난 축복받았어^^ 이런 가벼운 마음이 아닌, 다른 분들도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느꼈으면 좋겠어서요. 어차피 구원은 개인적인거라 내 믿음 지키기도 힘들기 때문에 거만하거나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마음은 아니에요. 제가 다른 사람을 그렇게 위할만큼의 위인도 아니고.. 잘못된 정보는 제 신앙 안에선 위험하다고 생각되어서 굳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최피터님의 글이 깊이있고 종교적 관점을 떠나선
훌륭한 글이라는 거엔 전혀 다른 이견이 없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