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장
18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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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은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찾고 결혼하는 내용입니다. 25장 20절에 따르면 결혼 당시 이삭의 나이는 40살로 고대 사회든 지금이든 이례적인 만혼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길 바란 아브라함의 고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신뢰하는 늙은 종을 자신의 형제 '나홀'과 그의 아들 브두엘이 사는 지역으로 보내 신부감을 찾게 합니다. 메소포타미아라고 명시된 지역 안의 '나홀의 성'이라고 표현된 친족의 거처에 이른 종. 이어지는 것은 여러 설화와 민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지혜롭고 덕 있는 신붓감을 찾기 위한 혼인 민담과 유사한 이야기입니다.
물을 청하는 길손에게 잎을 띄워 주었다는 이야기, 구혼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아버지의 수의를 만들고 다시 풀어버리길 반복하며 20년의 세월을 버틴 오딧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 <천일야화> 속 몇 년 동안 이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그의 사랑까지 얻는 세예라자드 등도 모두 비슷한 인류의 원형적 설화입니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나그네의 물을 달라는 요청에 당장 응하고 요구하지도 않은 낙타를 위한 몇 동이의 물을 나르는 수고를 자임하는 리브가의 모습은 비슷한 민담과 동화 속 주인공들이 그렇듯 이상적 인간이 가져야 할 미덕의 현현처럼 사랑스럽고 흐뭇합니다.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도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혼약에 대해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따라야 한다며, 만남 당일 딸을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데려가겠다는 제안도 수락합니다. 이렇듯 브두엘도 아브라함의 여호와에게 복종하는데 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지, 이들은 이미 '나홀의 성'까지 차지해 정착한 반면 왜 아브라함은 아내를 안장할 무덤도 과년한 아들의 신붓감도 찾기 어려운 떠돌이의 삶을 고수하고 있는 것인지 등의 의문이 떠오르지만, 뒷 이야기의 맥락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리브가가 있어야 아브라함의 혈통이 이어지는 것은 물론, 그녀의 아버지인 브두엘과 오빠 라반 등의 존재도 이어질 에서와 야곱의 서사에 필수적인 기능적 배역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24장의 주인공인 리브가에게 좀 더 주목해 봅시다. 생전 처음 본 먼 친척의 종이 전한 일방적 혼담에 순종과 신뢰로 따라나선 선하고 지혜로운 리브가는, 이삭이 사는 곳에 도착해 먼 발치에서 그를 발견하자 낙타에서 내려 스스로 얼굴을 베일로 가립니다. 어려서는 아비를, 결혼하면 남편을, 남편 사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같은 유교 규범이 떠오를 정도로 남성 중심적인 고대 사회가 빚어낸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 생각해보면 유대교 계열 종교가 요구하는 절대자에 대한 절대적 순종의 강조도 저런 보수적 사회 규범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모든 과거의 규범이 올바르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유교의 제사 풍습의 기원은 돌아가신 선조를 후손들이 하루라도 기억하자는 의미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풍습이 본래의 의미에 대한 이해 없이 껍데기만 전해지자 모두를 괴롭게 할 뿐인 구습으로 전락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아름다운 가치와 의미도 손상과 변질 없이 현대에 계승되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존재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진화론과 성소수자 수용을 포함한 가톨릭의 변화 등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갱신되었던 기독교의 역사로 재해석의 가치와 유효성은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루터의 시대로부터 무려 500년이 지난 지금, 성서에 대한 재해석을 터부시하거나 '무조건적 순종' 만을 강요하는 이들은 누구이고 그 이유와 그들이 순종의 수혜자를 자임하는 권위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길게 쓸 가치조차 느낄 수 없는 그 뻔하고 치졸한 정답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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