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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미래는 어떤가? 아니 미래가 존재할까? 많은 이들은 더 이상 소설이 갈 길은 없고 쇠퇴할 일만 남아있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여전히 소설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아직 미처 발견 못한, 삶의 흔적과 신비를 찾을 기회가 남아있다고. 밀란 쿤데라 역시 그런 이 중 하나이다.
그의 《커튼》은 소설에 대해 말한다. 쿤데라가 오래 전부터 사용한 소재, 소설의 본질과 그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쿤데라는 에세이 속에서 라블레를 시작으로 세르반테스, 발자크, 플로베르, 톨스토이, 프루스트, 조이스, 카프카, 곰브로비치, 무질, 브로흐, 마르케스, 푸엔테스, 그리고 자신의 이전 에세이인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다룬 루시디까지 그 자신의 ‘소박한 소설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위대한 작가들의 업적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하나의 렌즈이자 칼날이다. 소설은 무대 위에서 관객들이 놓친 요소들을 발견하고 확대한다. 그리고 무대 뒤편의 커튼을 찢으며 열어젖힌다. 그렇게 소설사는 흘러왔다. 삶의 뒤편을 보이고 새로운 주제를 확대하며 다른 문학 장르와, 뿐만 아니라 글이라는 전체의 형식에서, 떨어진 채 스스로의 역사를 걸어왔다.
소설에게 여전히 가능성은 남아 있는가? 소설이 아직 얘기할 것이 남아있는가 라는 질문이라면 난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적어도 인간이 두 다리를 땅 위에 붙이고 있는 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만일 인간이 소설의 역할을 포기한다면, 무지에 의해 소설의 가능성을 내던진다면, 스스로에게서 소설가라는 직업을 내치고 이 모든 것을 기계에 맡겨 버린다면... 소설의 종말은 스스로의 부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지가 주장하는 불필요성과 그 책임의 전가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소설은 지난 4백년 간 인류에게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중에는 단순 반복과 감성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수명을 유지하는 작품도 분명 존재하나 위대한 소설들에 인류의 의식이 빚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과학의 위대함을 찬양하려 하는 자들은 괜히 비타민이 하는 역할에 아미노산의 필요성을 갖다 붙이지 말고 귤이나 까먹어라). 그러나 내가 가장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일이라면, 아직 수명이 남은 소설에게 사망선고를 내리고 그 미래를 기계에 던지게 될 미래이다. 소설이 밝힌 현재도 충분히 탐색하지도 않은 채 땅에 묻어버리는 현실이 온다면, 아, 나는 차라리 인간에게 소설의 유산을 넘겨받는, 데이터에 근거해 움직이는 새로운 지적 생명체들에게 예술의 미래를 기대하겠다.
《커튼》의 마지막 문단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서글픈 마음에 사로잡혀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예술이 절대로 말해진 적 없는 것을 찾기를 그만두고 다시 유순해지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예술은 반복을 아름답게 만들고 개인이 기쁜 마음으로 순순히 획일적인 존재가 되도록 돕기를 요구하는 집단의 삶에 봉사할 테지.”
“왜냐하면 예술의 역사는 덧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하다.”
쿤데라가 다른 장에서 인용한 것처럼 과학과 달리 이전의 예술은 단순히 과거, 그러니까 진보의 성질이 아니라 마인드맵처럼 동시다발적이고 각자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니까 예술이나 소설의 생존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듯
그니까 내 말은 이제 그 영역 확장도 없이 ai한테 모든 창작을 맡기고 그리스 비극 무한반복할 미래가 될까봐 걱정이라는 거임.
소설가나 미래를 걱정하면 하겠지 아무나 걱정을 할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