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라2도 금지어 실화냐?


영어에 그리 능숙하진 않다보니 원서로 읽은 책은 보통 감상을 쓰지 않는 편이지만, 이 책은 그럭저럭 빠짐없이 이해했다 싶고 선물로 받은 책이기도 하다보니 몇 가지 생각을 풀어놔도 괜찮지 않을까. 다만 저자 윌리엄 피터 블래티가 현대 미국 호러 문학에서 상당히 유명하면서도 국내에 거의 번역되지 않은 저자인데, 하필 유일하게 번역된 <엑소시스트>를 읽은 게 약간 아쉬운 감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어 번역본도 도서관에서 슬쩍 집어와 비교를 해볼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가톨릭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문장이나 어휘 자체는 적당히 읽을 만해서 크게 잘못 읽진 않았겠거니 믿는다. (게다가 어쨌든, 영화 <엑소시스트>를 봤으니 머릿속에 그 내용이 바로 떠오를 수밖에)

줄거리 자체는 영화와 비슷하지만, 상당히 특이한 점은 이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의심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미심쩍은 증상 이후 리건이 서서히 악령에 사로잡힌 뒤로 이백 페이지 이상, 리건의 어머니와 의사, 신부 카라스는 모두 리건의 증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무언가로 확정짓지도 못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답안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며 읽겠지만, 여러 심령적인 불길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리건의 병세의 원인은 최종장까지는 결코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구마 의식이 리건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조언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요인에서 나온 이야기이며, 어머니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뭐라1도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카라스를 붙잡는데다, 카라스는 내심 이 어머니 본인이 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며 리건의 증세를 몇 번이고 의심한다.

이 의심은 정신분석 임상심리의 불확실성과 맞물려 더욱 문제를 일으킨다. 근본적으로 리건의 증세를 합리성의 바깥에서 진단하는 건 불가능한데, 다양한 정신질환의 징후는 리건을 어떤 식으로든 사로잡는다. 다중인격 장애, 알지 못하던 언어를 말하는 것, 성인 남성을 압도할 정도의 괴력을 발휘하는 것 등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은 늘 있고, 심지어 특정 증세를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리건 스스로의 믿음, 자신이 악마에게 빙의되었다는 믿음에서 기인하며 그녀 스스로 증상을 무의식 중에서 실현하고 있을 뿐이라는 반박 불가능한 생각까지 카라스의 마음을 현혹한다. 구마 의식을 거부하며 카라스가 지적하듯, 의료 행위가 아니라 구마 의식으로 사람을 치료한다는 생각은 몇 백 년 전부터 이미 허황된 것으로 생각되었고, 기묘하게 구멍 뚫려 모든 것을 엉성하게나마 포획하려 하는 이 합리성의 그물에서라면 더더욱 그 허황됨이 분명하다.

특히 이 <엑소시스트> 내의 합리성이란 지금 읽기엔 상당히 기묘하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리건의 증세가 단순한 정신질환이 아니라 악마 같은 초현실적인 존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입증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부분의 독자는 초능력 등을 말할 것이다. 아무리 흉악한 얼굴로 변하고 소리지르고 뭐라고 지껄여봐야, 침대가 요동치고 마음을 읽으며 손도 대지 않은 먼 곳의 물체를 움직이는 것보다 더 비합리적인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책이 집필된 1971년 기준으로 폴터가이스트는 빙의 현상과는 다르게 분류되는, 실존하는 현상이며, 염동력이나 독심술 같은 ESP는 사춘기 아동에게서 흔히 발현될 수 있는 물리적 증상이다. 마치 리얼리즘 작품인 디킨스의 <황폐한 집>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체 발화 현상을 사실적인 요소로 집어넣는 것만 같다. 그렇게 사람의 정신이라면 (당연히) 뭐든 할 수 있다는 전제 속에서 카라스가 집중한 건 오히려, 리건 안의 인격체가 정말로 리건과 완전히 다른 것 같다는 걸 보여줄 의미론semantics 분석과 악마가 손쉽게 속일 수 있는 성수 뿌리기다.

성수 뿌리기를 포함해 카라스가 리건이 악마에 빙의되었다고 판단하고자 직접 대면해 시행하는 테스트는 전부 실패한다. 합리성의 영역에서 본다면 이는 카라스 본인이 그 합리성을 스스로 구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판단하는 당사자 본인이 모든 가능성을 합리성의 차원에서 포획해 이유를 부여하고, 남은 선택지를 고갈시킨다. 그건 올바른 선택지가 남을 때까지 틀린 선택지를 쳐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허나 다시 한 번, 사람의 정신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든다는 <엑소시스트>의 당당한 전제로 돌아온다. 의심은 결코 해소될 수 없다. 리건 스스로가 증세를 만들고 있다는 진단처럼, 카라스가 진행하는 모든 테스트의 정답이 카라스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악마가 이를 읽어낼 수 있는 탓이다. 대부분의 심령 의식/현상이 그랬듯 스스로 친 함정에 속아넘어가는 회의주의자가 될 수는 없지 않겠던가?

그러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악마는 실제로 카라스를 고갈시킨다. 유령 문학의 고전,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과 함께 보면 흥미로운 유사성이 보이는데, 두 아이가 악마에게 빙의당했다고 의심하는 교사는 자신의 의심에 대한 확신도 반증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두 아이를 고갈시키다가 결국 죽게 만든다. 반면 <엑소시스트>에서 의심은 고전적인 악마 구도 그대로, 악마가 스스로 유도하는 것이며, 악마에 들린 아이는 여기서 사는 대신 구마 의식을 진행한 두 신부는 죽는다. <나사의 회전>에서 비현실적 존재는 제대로 스스로를 밝히지 못한 채 두 아이의 목숨과 함께 쫓겨나며, <엑소시스트>에서는 자신의 악마적 기원을 분명히 밝혔다가 합리성을 완전히 져버린 카라스와 함께 죽는다. 건전한 의심을 요구하는 합리성의 차원에서 <나사의 회전>은 승리했지만 <엑소시스트>는 패배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별개로, <엑소시스트>는 가톨릭 외부의 기원을 가진 존재가 가톨릭에서 '악마'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되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신 파주주를 기독교의 악마 중 하나로 생각하기란 어렵다. 허나 이 출신 배경과 달리 파주주가 구사하는 기묘한 언어는 단지 영어를 거꾸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는 정답이 나오며, 그의 다양한 면모는 예수가 구마한 '군단legion'이라는 이름과 함께 일종의 정신병리학적 환각으로 취급된다. 메린 신부가 카라스에게 단호하게 조언하듯, 이들은 마주할 모든 기이한 존재를 그 악마라는 이름 하나로 대응해야만 한다. 나머지는 모두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악마 숭배라는 것이 그 자체로 어찌나 기독교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모든 신성모독적인 행위는 결국, 기독교의 신성함을 역전시킬 뿐이다-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마찬가지로 악마 숭배 문화에서 자라난 블랙 메탈을 생각하면 더욱 묘한 일인데, 악마 숭배가 그저 기독교적인 문화일 뿐이라고 판단한 북유럽의 여러 밴드는 대신 옛 북유럽 신화의 신들을 새로운 숭배 대상으로 삼았고, 미국 마운트 이레의 <Wind's Poem>처럼 인격 없는 대자연 자체를 공포스러운 신으로 섬기는 앨범도 있다. (물론, <엑소시스트>의 파주주를 이름으로 따온 밴드 Oranssi Pazuzu도 있다!) <엑소시스트>와 블랙 메탈의 차이점은, 전자는 실제로 이 아이러니함을 노렸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블래티는 영화 <엑소시스트>를 극찬했지만 딱 하나, 메린의 한 마디를 빼먹은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카라스가 왜 하필 리건이 빙의되었을까 의아해하자, 이 모든 일의 요점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고 우리가 추한 동물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게 만들어 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으리라 믿게 만드는 데에 있다고 대답한 부분이다.

어찌 되었든, <엑소시스트>는 대중주의적인 기독교 소설이다. 신앙을 의심하던 카라스는 신앙심과 합리성 사이에서 계속 고민하며, 최후의 최후 신앙의 힘으로 악마를 자기 품에 끌어안고 순교한다. 모든 추악함이 기독교 안에서 말끔하게 정리될 수 있다고 보여주는 결론이다. 그러니 메린의 말이 사실상 독자 모두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장르를 위한 외설성 및 스펙터클과 함께, 물론) 그렇게 아름답고 슬픈 희생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이 해결된 세상에서 기독교는 파주주를 악마로서 퇴치하고 다시 한발짝 더 확장을 향해 나아간다. 영화 <엑소시스트>는 일종의 헬 하우스hell house(미국 근본주의 교회에서 운영하는 지옥 체험관)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치료를 위한 충격을 주며 다시금 기독교의 승리를 믿게 해주는, 그런 종류의. 그리 생각하면 00년대 인터넷에서 <엑소시스트>의 리건이 점프스케어의 대표격 이미지-아마 <무서운 마우스 피하기> 게임의 영향력이 컸을까?-로 쓰였다는 게 참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블랙 메탈처럼, 기독교에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의 탈맥락화된 취사 선택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