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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지만, 나치 독일의 운명은 한 전투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소련과의 전쟁을 선포한 독일은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소련 영토로 밀고 들어왔는데, 소련의 주요 거점인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위한 싸움에서 측면이 뚫려 예상치 못한 포위를 당하며 대패하고 만다. 깊숙한 소련 영토에 들어온 병사들은 기름 보급선이 끊긴 채 서서히 고사했고, 소련은 이 대승을 계기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자 진격을 시작했다. <삶과 운명>은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하는 대하소설로, 단순히 여러 전선에서의 모습만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의 다양한 지역에서의 삶과 독일의 모습까지 비추며 그 시기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이들이 느끼는 '운명'이라는 것이 어찌나 아이러니한 것이었는지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조금 불평을 할 필요가 있겠다. <삶과 운명>은 엄밀히 따지자면 <스탈린그라드>라는 제목으로 나온 1부 소설의 다음편이다. (실제로 <삶과 운명>에는 종종 '전작'에서의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삶과 운명>에는 안 그래도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나온다. 물론, 러시아 문학이 늘 그렇듯 이름과 부칭, 성, 애칭, 비칭이 아무렇게나 섞여서. <삶과 운명>의 등장인물들은 그저 넓은 지역의 다양한 사람인 걸로 그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가 많은데 이 연결고리는 이따금 눈치채기 힘들 수준이다. (예를 들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최전선에 서 있던 사람 이야기를 왜 갑자기 이론물리학자의 아내가 꺼내는지?) 따로 찾아봐 짐작하건대 <스탈린그라드>의 끝은 중심인물들이 전쟁으로 인해 피신하며 흩어지는 내용이고, 덕분에 <삶과 운명>은 이 알게 모르게 연결된 인물들이 완전히 다른 곳에서 별개의 서사를 쌓다가 점차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날이 다가올수록 다시 뭉치는 구성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물론 독자는 <스탈린그라드>를 읽어봤을리가 없다. 역자의 선택은, 이따금 1부의 내용이 암시될 때마다 주석을 달아 그 때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정도. 물론 그리 충분한 정보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두 자료(<스탈린그라드> 인물표, 샤포스니코바 가계도)를 참고해서 읽어볼 만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번역을 하면서 참고한 인물표 정도는 정리해서 책에 함께 첨부해놓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류드밀라(류다)가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 똘랴-아나톨리의 애칭-가 왜 갑자기 정치범의 입에서 나올까? 정답: 그냥 이름이 같아서. 베라가 이 가문의 손녀인 건 알겠는데, 대체 누가 낳은 자식일까? 정답: 이미 죽은 건지 <삶과 운명>에서는 나오지도 않는 듯하다. (이쪽은 추측이지만, 최소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장면이 휙휙 바뀔 때마다,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좀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별개로 책의 내용 자체는 확실히 대단하다. 흐루쇼프 해빙기에 탈스탈린주의를 보이는 듯한 기류 속에서 집필된 <삶과 운명>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기를 둘러싼 소련의 모든 어두운 측면을 드러낸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소련 내에서의 유대인 차별이 대조되며, 나치즘의 유토피아주의와 비견되는 건 오직 스탈린주의 뿐이라는 걸 생각해보라고 늙은 공산주의자 포로를 설득하는 나치 친위대가 등장하며, 말로는 부농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굶어죽는 농민일 뿐인 우크라이나의 현실이 드러나고, 권력의 무게추가 어디에 실렸느냐는 딱 하나의 차이로 진리와 헛소리가 뒤바뀌는 사람의 고뇌가 참 주도면밀하고도 가차없이 서술되는데다, 당시 소련의 정책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듯한 서술이 종종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러시아인은 이제 국가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는 식) 아무리 해빙기라도 이런 책이 나오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겠거니 싶다.


특히 <삶과 운명>에서 탁월한 점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전 이후 슬슬 다시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하는 국가의 존재감이다. 매우 서구적인 인물인 이론물리학자 시뜨룸이 개인의 자유, 사회와 무관한 학문을 믿으며 이에 정면에서 반항하는 것과는 별개로, 작중 많은 이들은 소련 정부를 두려워하면서도 믿고 따른다. 그것이 내부의 정당화이든 진심이든, 1937년-대숙청-의 이들은 실제로 공산주의의 적이었고, 최근 잡혀간 정치범은 예전부터 낌새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고 말하며, 사태가 완전히 해결되어 가까이 해도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기 전까지는 거리를 둔다. 이런 이들이 공산당의 적으로 지목되어 심문을 받는 순간, 자연스럽게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독일군을 쏘아 죽이고 있을 때 너는 이런 안전한 곳에서 훼방이나 놓고 있느냐? 너는 대체 누구길래 제2인터내셔널에도 있었던 내가 당의 적이라고 하느냐? 그리고 후자를 말한 끄리모프가 생각했듯, 이는 숙청당할 모든 이들이 자신의 '심문자'에게 내뱉은 말이었을 테다.


이런 전체적인 흐름 뿐 아니라 소박한 부분마다 흥미로운 구석이 있던 책이기도 했는데, 친구들과 러시아 문학을 논하던 시뜨룸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스탈린 시절의 도스토옙스키 탄압, 톨스토이와 데카당스가 둘 다 자신을 중심에 두는 이단으로 서로 통한다는 이야기, 러시아 문학에 민중을 처음으로 도입하고 조명한 것이 체호프였다는 이야기를 보며 <삶과 운명>을 보면, 그리 많은 소련 민중의 목소리가 서로 왁자지껄하게 갈등을 일으키며 방대한 영토 속에서 얽히는 이 글은 정말로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가 합쳐진 꼴이 아닐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이 셋이 삶을 그려내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론물리학을 포함한 소련의 학문은 민중의 삶 위로 굳건한 지식의 정권을 쌓아 올리고 있다. "신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된 인간이 "악마마저 넘어서면" 이 생명은 "온 우주를 은하계 강제수용소로 변화시키지 않을까" 물으면서. 그리고 "보안부 조직을 찬양하는 계관시인"이 괴팍하게 웃으며, 철조망 밖의 삶이 안과 비슷한 수준이 되면서 온 세상이 수용소가 되는 날이야말로, 소련은 형사범이 유능한 죄수를 지배하는 일 없이 모든 힘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게 되리라고 아름다운 미래를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