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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오래전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퍼진 바가 있다. 인명을 개념으로 바꾸어 번역했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원제를 훼손한 사례라 보아야 하겠지만, 읽고 나니 참 적절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혜를 대변하는 나르치스와 감성을 대변하는 골드문트의, 서로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반대의 길을 걸으면서도 속으로 서로를 동경하는 오묘한 조화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은 골드문트 혼자라고 생각한다. 골드문트가 방황하는 이야기의 분량이 나르치스가 등장하는 분량보다 훨씬 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르치스보다 골드문트에게 더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르치스는 이지적인 것을 넘어서 세속을 초월한 사람으로 보인다. 20장짜리 소설에서,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의 특성과 대비를 일찍이 파악하고 서로의 길을 제시하는 장면이 불과 3장에서 나온다. "모름지기 우리의 우정에는 네가 얼마나 완벽하게 나와 다른 존재인가를 너한테 보여 주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목표도 의미도 없어." 4장에서도 그는 일찍이 이 소설의 결론을 제시한다. "우리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서로가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반면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만큼의 통찰력이 없다. 대신 직접 수도원 밖으로 나가 삶과 부딪히며 천천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달아나갈 뿐이다. 나르치스처럼 철학적으로 조숙하지 못한 채로 밖으로 나가 여러 타인들과 부딪히며 자신을 깨달아가는 골드문트의 모습이 우리네 인생의 일반적인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드문트의 여정에도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골드문트는 열정이 앞서면 지나치게 뒤를 생각하지 않고 달려든다. 자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가 쫓겨나고, 정당방위라고는 해도 아무튼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변덕스러운 성격 탓에 여러 사람을 의도치 않게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쾌락과 그에 대한 책임을 함께 배우는 요즘 사회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공감하더라도 동조할 수 없는 태도다.
하지만 골드문트의 행적의 밑바탕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깔려 있으니, 바로 삶을 향한 의지다. 골드문트는 일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지 못하는 성격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운명의 흐름에 맞서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 취하려는 것이 골드문트의 태도다. 특히 그의 행동에는 죽음에 대한 반기가 서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자신의 소원을 이뤄보려고 버킷리스트를 써가며 발버둥 치지 않는가? 골드문트는 그 발버둥이 유난히 극단적이지만 아무튼 우리와 같은 근간을 공유한다. "죽음에 맞서 저항했던 것이야말로 가장 강렬하고 기묘한 체험이었다. 자기 자신이 왜소하고 비참하며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죽음에 맞서 최후의 각오로 절망적인 싸움을 벌일 때면 생명의 아름답고도 놀라운 힘과 끈질김이 몸속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그 체험은 여운을 남겼다."
골드문트가 작가의 죽음 후에도 남는 작품들을 동경하여 예술가의 길에 뒤늦게 투신한 것도 삶을 향한 충만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처음부터 한계를 갖고 있었다. 세상은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행복을 목표로 하던 수많은 소박한 영혼들이 흑사병에 휩쓸려나갔다. 신은 완벽하다지만 정작 신이 만든 피조물들과 신이 피조물을 다루는 무신경한 방식에 골드문트는 크게 실망한다. 결국 뜨거운 사랑도 죽음으로 허망하게 스러질 운명이라면 골드문트의 모든 발걸음에도 의미가 사라진다. 골드문트의 고해에 씁쓸한 심리가 절로 묻어 나온다. "하느님 아버지, 저는 당신으로 인해 길을 잃었나이다. 당신은 이 세상을 악하게 만드셨고, 세상의 질서를 잘못 세우셨나이다." 나아가 골드문트는 꿈도 잃고 만다. 결국 죽음에 굴복할 운명이라면 하나의 길만 파고드는 장인이 되는 것은 더욱 허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예술에 투신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깎아먹어야 하는데, 죽음이 다가올 때 다른 것들을 모조리 포기하고 걸어갔던 외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골드문트는 기세 좋게 나가서 자유의 단맛을 보다가 그 뒤에 느껴지는 가릴 수 없는 쓴맛을 보고 주저앉고 만다.
그때 선각자 나르치스가 돌아온다. 나르치스는 수도원장이 됐지만 신의 섭리에 부당한 면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세계관에 진리가 아니라 상상이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한다. 세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바람을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신이 만든 세계를 미적으로 참을 수 없는 졸작으로 보는 것이다. 나르치스는 사고하고, 골드문트는 상상한다. 나르치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개념으로 포착해 논리로 체계화하는 사고법을 가졌고, 골드문트는 자신이 바라는 형상을 만들어 직접 구현해낼 가능성을 가졌다. 나르치스는 사상가의 자아를, 골드문트는 예술가의 자아를 지니고 있다. 모든 자아를 균등하게 지닌 완전한 신과 달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한쪽으로 쏠린 자아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둘은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는 운명이고, 자신이 가진 한계 탓에 매정한 삶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가 마음을 모아 지성은 방향을 알려주고 감성은 이에 감응하여 형상을 빚어내면, 지와 사랑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지 못한 우주 속에서 아름다운 소우주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골드문트가 마음을 다시 잡고 만든 첫 작품은 자신의 방황이 아니라 자신을 이끌어준 현자들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다. 마지막 작품은 자신의 자아에 충실하여 사랑했던 여인의 상을 마리아 상에 옮겨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의 차이를 더욱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서로를 동경하는 마음을 더 키워나간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골드문트는 늙어 매력을 잃었고 더는 자신의 자아를 실천해나갈 수 없게 됐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예술을 동경하게 됐지만 사고 이외의 다른 산물을 낼 수 없는 자신을 개선하기에는 늦었다. 조화를 이룬 둘이 마지막으로 나아간 길은 체념이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그렇게 조금 씁쓸하게 끝난다.
주인공 골드문트의 성장을 참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자신의 한계 때문에 주저앉았다가, 나르치스를 다시 만나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여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골드문트는 필멸자라는 한계를 애초에 벗어날 수 없었지만, 지성의 인도로 자신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깨닫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길을 모르는 동안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았고, 길을 알게 된 후로는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일을 해냈다. 어떻게 보면 골드문트의 선택지가 좁아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지도 모른다. 즉 자유를 잃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끝을 볼 수 없는 옆길에 발만 담갔다가 과감히 버리고 인생의 진정한 종점으로 향했다. 스승 니클라우스의 길을 자의로 걸은 셈이니 골드문트가 본 손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르치스를 다시 만나기 전의 골드문트가 그랬듯이, 사람은 자아에 대한 인식 없이 자신의 의지를 길잡이 삼아 편향적으로 걸어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골드문트의 삶을 완성한 것은 나르치스였다. 또 나르치스가 자신의 세계관에 갇히지 않고 그 너머를 보게 한 것은 골드문트였다. 사람은 이성적으로만 살기도 어렵고 감성적으로만 살기도 어렵다. 이성과 감성의 적절한 조화만이 인간을 완성할 수 있다. 현실에만 몰두하여 가능성을 놓치지는 말아야 하며, 나를 이끄는 모든 충동에 감응하지 말고 내 인생에서 그것이 갖는 실질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생은 사색 없이는 길을 잃고 감성 없이는 재미를 잃는다.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한다면 두 명의 사냥꾼이 필요하다. 이것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내게 주는 교훈이다.
문제는 이 교훈을 어떻게 실천해나가느냐일 것이다. 사실 내면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모습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도 어렵다. 나는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굳이 따지면 나르치스에 가까운 것 같다. 생각은 많이 하지만 무언가 산물을 만들어낸 바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골드문트의 역할을 맡아 줄 친구를 찾거나, 골드문트가 되는 연습을 해나가야 할 것 같다. 소설은 이미 끝났으니,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후속편은 내가 직접 써나가야 한다. 이제부터 내가 걸을 길, 내 곁에 둘 동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겠다.
나도 원제보단 지와 사랑이 더 낫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