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난독증이 있다.

나무위키나 쉬운 문학책은 잘 읽히는 걸 보면 아주 중증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난이도가 있는 비문학책은 더럽게 안읽힌다.

나는 인문학/철학책을 좋아하고 지적허영심도 강하기 때문에
난독증은 내게 꽤나 거슬리는 증상이다.


내 난독증상은 이렇다.
같은 문장을 또읽고 또읽고 또읽으며 되뇌인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잘 안되고
그렇게 애써서 한 페이지를 다 읽어내도 기억엔 안남는다.
그래서 시간과 노력 대비 결과물이 처참하다.



2.

난독증 10년 동안 정말 많은 방법론을 찾아헤맸는데(ex: 능동적으로 읽어라, 질문하며 읽어라, PQ4R 독서법 등등)

그 중 유일하게 내게 효과를 보여준 방법론을 소개해볼까 한다.


그 방법의 이름은 '주어 서술어 찾기'이다.

이 방법론도 '뇌를 쓰며 읽어라'라는, 전통적인 독서법 조언과 큰 틀에선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내겐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 이거였음.


물론 이 갤에 이 방법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초등학생이 아닌 이상..)

그래서 자세한 설명을 하진 않을 거다.


대신 난독증을 겪는 사람이 이 방법의 효과를 어떤 식으로 보고는지 묘사할 거임.




처음 책을 펼치면 (약간 과장 보태서) 난 이렇게 보인다.




물론 눈으론 글자글자들이 보인다. 하지만 뇌로는 이해가 안간다.


과거엔 그냥 '무작정 읽으면 이해가 가겠지' 하며 읽었다. 당연히 안읽혔지만.


이제 나는 문장의 주어부터 찾는다.





아하, 주어는 선원들이구나.



가끔 주어를 찾는 게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보통은 세 가지 원인이 있다.

1. 3중 이상의 겹문장인 경우

2. 주어가 생략된 경우

3. 수식어구가 너무 길어서 뭐가 주어인지 물리적으로 찾기 어려운 경우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약간의 시간만 들이면 주어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주어를 찾는 게 결과적으로 시간을 아끼는 길이다.


하여튼 주어를 찾으면 서술어를 찾는 건 그나마 쉽다.



선원들이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다.

이 타이밍에, 우리들의 뇌는 결핍을 느낀다는 것이다.


"선원들이 뭘 말한다는 걸까?"


내 뇌는 바로 결핍된 정보를 찾아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오호? 선원들이 말한다? 뭐라고 말한다는 거지?"



아하 이렇게 말한다는 거구나!



뇌는 남은 정보들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위해 찾아나선다.

"이 선원들은 어떤 선원들이지?"


아하

.한 과학소설에 나오는 우주선을 탄 선원들이고, 향수병에 걸렸구나.





이런 식으로 문장의 주어-서술어를 찾고
남은 부가정보들을 와장창 집어먹는 방식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비해 (당연히) 이해도 더 잘되지만
뭣보다 맘에 드는 건 책읽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이다.

1분당 읽는 페이지 수가 2~3배정도로 늘었다.




왜 빨라졌나 생각해봤는데

책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정독하는 건, 마치 내게 20첩 반상을 내미는 것과 같더라.

뭐부터 먹어야할지 모르겠고 한입만 먹어도 이미 배불러서 죽겠음


근데 이렇게 주어-서술어만 먼저 찾는 건

마치 내게 피자 한조각만 주고 콜라를 안주는 느낌

근데 저 앞에 콜라가 딱 한 잔 있는 거지.

난 거기로 달려가서 엄청 들이마실 수 밖에 없게 되는 거야.





이 방법이 모든 사람들에게 통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한 명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이 간단한 걸 하나 못해서 똑같은 책을 몇 주 동안이나 읽는 건 참 괴로운 일이거든.


난독증상이 없는 사람들에겐 그냥 재미있는 케이스 하나로만 생각해주면 좋겠다.
너희는 위의 모든 일들을 무의식적으로, 번개같은 속도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