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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알게 된 책은 그래도 여기다 감상 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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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는 참 특이한 철학자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중심지로는 취급되지 않는 덴마크에서 나왔고-덕분에 이름을 쓰는 방식조차 키에르케고르, 키르케고르, 키에르케고어 등 참 다양하게도 통일되지 않았다-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짙은 기독교적 색채로 인해 사실 무교 청중에게 그리 자주 읽히는 편은 아닌데, 그렇다고 당대 기독교와 좋은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 독실한 신자보다는 철학자로 훨씬 유명했던 그는 대부분의 철학적 저작을 키르케고르라는 이름 대신 별도의 가명을 바꿔가며 저술했고, 자신의 이름으로는 주로 대중적인 신학서를 내곤 했다. (후자의 경우도 한국에서 여러 기독교 단체가 번역하곤 했다) 이런 들쭉날쭉한 이력과 어울리듯, 그의 철학서는 곧잘 결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듯했고,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듯 심미주의 낭만주의자와 경건한 브루주아의 삶을 대비시킨 키르케고르는 둘 중 어느 쪽을 고르지도, 이를 통합하지도 않는다. 사실, 그의 사상을 하나로 요약하자면 '모든 건 자신의 믿음에 달렸다'는 악명 높은 상대주의인 것처럼 보이긴 한다.
물론 이런 상대주의적 사상 자체가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믿음에 달렸다'에 주목한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색채를 빼 신앙의 중심을 옮기거나(하이데거, 사르트르) 이성적 비판 대신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전회(칼 바르트, 폴 틸리히)하곤 했고, 반대로 '모든 건'에 주목한 해체주의는 그 어떤 진리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근대성 비판(데리다, 보드리야르)의 단초를 키르케고르에게서 찾았다. 이런 시도는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일, 혹은 공고히하는 일을 약화시켰고, 실제로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변증법을 통한 절대정신의 추구를 부정했을 뿐 아니라 대중정치를 힐난하고 덴마크 국교회의 정당성을 공격하며 사상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에서 체계를 흔들어놓았다. (그런 점에서 키르케고르가 해체주의 뿐 아니라 소위 포스트모더니즘과 높은 친연성을 가진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접근은 키르케고르 본인에게 중요했던 요소를 빼먹고 있다. 그가 무엇을 위해 이를 했는가?
<쇠렌 키르케고르 입문>은 이 질문의 해답을 키르케고르의 석사 논문 <아이러니의 개념>에서 찾는다.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다루는 이 논문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헤겔의 소크라테스 해석을 어느 정도 긍정하되 헤겔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낳는다. 소크라테스는 아이러니를 자신의 무기로 삼는데,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 다음 상대가 "무언가를 잘 알거나 혹은 전문가라고" 인정한 뒤 이를 설명해 정의하도록 하는 식이다. 이것이 아이러니인 이유는 먼저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상대보다 무언가를 더 알고 있는 상태이고(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이 대화의 결과는 상대를 대답할 수 없는 "아포리아" 상태로 만들어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소크라테스의 의무는 아이러니를 통해 지식이 아닌 것을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헤겔은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관습적인 외면적 도덕에서 주체적인 내면적 도덕으로 나아가는 단초라고 보았으며,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판단했다. 그는 실제로 아테네의 공적인 도덕을 공격하고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이였다. 그는 그리스의 일반적인 신 대신 자기 내면의 신 다이몬을 믿었고, 젊은이가 기존 관습에 맞는 일을 하는 대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도록 격려했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시도는 내면적 도덕의 계기가 되었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 이로부터 긍정적인 것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헤겔의 변증법이 논하듯,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시도는 곧 이 둘을 연결해 더 나은 것을 만드는 정반합의 절차를 이뤄야 하며 소크라테스는 그저 정반에서 그쳤단 점에서 부정적인 인물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인간 이성을 제도의 중심에 놓는 "주관적 자유"가 시작되려면 소크라테스보다는 더 나아가야 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해석과 결별한다. 헤겔이 두 반대되는 것을 서로 연결하여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지식의 통합을 믿은 것과는 달리, 키르케고르는 정반대라고 보았다. 두 상반되는 앎은 어느 쪽도 진리를 품고 있지 않으며, 통합될 수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 부정을 보여주는 인물이기에 위대한 인물이며, 그가 아포리아에서 나아가지 않은 것은 현명한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구축하는 인물이 아니라, 진리로 나아가는 길을 구축하는 인물이다. 진리는 피상적인 정보가 아니다. 각 개인, 너무나 무개성해 서로 구분될 수 없어 보이는 개인이 오직 자기 안에서만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보편적인 차원에서는 의미가 없지만 그렇기에 개별적인 차원에서 이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만 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의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대신 이미 상대가 내포하고 있는 것을 낳도록 도와주는 "산파"라고 비유했듯, 키르케고르 역시 이를 돕고자 했다. 키르케고르의 여정은 이러한 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 키르케고르가 헤겔과 마찬가지로 낭만주의를 비판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이러니를 통해 지식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행위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상대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했으며, 키르케고르 역시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고뇌 속에서 진리를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글을 썼다. 반면 낭만주의자가 아이러니를 활용한 이유는 좀 다르다. 낭만주의자는 계몽주의와 기성 질서에 대한 반발로, 계몽주의가 이룩하고 기성 질서에서 절대적으로 여기는 진리가 전부 그리 탄탄하지 않은 바닥 위에 서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자 했다. 자신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부르주아를 비웃으며 그것이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내팽개치는 식이다. 그런 다음, 진리는 개인의 주관에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마음상태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을 믿었다. 키르케고르는 낭만주의자와 소피스트 사이의 유사성을 보았으며, 이들이 아이러니를 사용하는 것은 그저 가짜 진리를 세우기 위함이라고 비판했다. (대표적 낭만주의자인 슐레겔이 결국 인생 말미에 자신도 믿지 못하는 낭만주의를 저버리고 개종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대신 키르케고르는 결코 가짜 진리를 세우지 않는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두려움과 떨림> 등의 여러 저작에서 그는 보편적 차원에서 하나의 온전한 진리를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되,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설명하는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저 각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고뇌하며 진리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정한 신앙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키르케고르의 덴마크 국교회 공격은 이런 점에서 가짜 기독교를 비판한 것인데, 성경에서 드러나는 옛 기독교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그저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점 하나만으로 자연스럽게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인정받는 당대의 모습과 이를 승인하는 국교회가 가짜 기독교를 세우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그대로 두는 것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신앙을 갖지 못한 채 가짜를 섬기고 있는 걸 내버려두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키르케고르는 죽기 직전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공격적인 영향력은 사후 장례식장에서도 발휘되었으며,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시간이 꽤나 흐르기 전까지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이 모든 점을 종합했을 때, 키르케고르를 기독교와 분리할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를 신으로부터 분리시킨 실존주의를 긍정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믿는 기독교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기독교와 가까운지는 늘 의문이다. 소크라테스가 기독교도와 다름없었다는 키르케고르의 지적처럼, 키르케고르가 주장한 기독교는 교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이 올바른 것이며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해나가는 진리 추구의 과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키르케고르의 모든 업적을 어떻게 해석하든 이것이 사적인 영역 밖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리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한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어떻게 외부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해도 그것은 신앙심의 본질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키르케고르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는, 자신의 가장 깊은 뜻을 외부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포기해야만 한다. 참 고된 길이다.
잘 읽었어요. 좋은 글 감사해뇨. (디시콘에 키르케고르가 없어서 샤르트르가 웃는 것으로 보냈어요. 사정은 아무러하든 실존주의자이니 상관 없지요? ) - dc App
인물 주작은 뭐야
아 추가로 이거 기독교 단체에서 번역한 거라서 그런지 설교하듯이 대화체임
기독교도 입장에서 모든 기독교도는 대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자기 자신 각자의 신앙관을 갖고 있어야 함 그게 바로 만인제사장주의가 말하는 바고 그런 면에서 키에르케고어는 모든 기독교도가 각자의 "믿음다운 믿음"을 갖게 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선지자라고도 얘기할 수 있음
그리스도교를 뺀 키에르케고어 <<< 이새끼는 그냥 소크라테스 빠돌이임ㅋㅋ
이유가 있어야 믿나요 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 내가 그러기는 쉽지 않은 게 한임
신앙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의 해석을 가장 과격하게 요약하면 "덮어놓고 믿는게 진짜 믿음이다"인데 이거 기독교인들조차 못받아들이는 사람 꽤나 있음ㅋㅋ
슐라이어마흐같은 사람인가용
영향은 받았겠지만 점점 별로 안 좋아했을 거 같음
믿음의 도약!
니체-쇼붕이-키에르케고르 순으로 한국에서 유행할 것 같다
이 댓글이 성지가 되기를
근데 주관 속에서만 가능한 진리가 진리라고 불릴 수 있나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