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2장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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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두 번째로 추방자가 된 야곱은 갈 곳이 없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얻기 위해 14년, 라반의 요청 때문에 6년을 일했으니 총 20년이나 헌신했으나 라반에게 야곱은 가족이 아닌 경쟁자일 뿐이었습니다. 라반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었다기 보단 농경이 거의 불가능한 사막 지역의 생리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강력한 군장적 면모도 갖지 못했으니 그나마 돌아갈 곳은 자신이 기만하고 축복을 가로챈 형 에서가 머무는 땅 뿐입니다. 누구보다 에서의 성격과 자신이 그에게 저지른 죄악을 알고 있는 그는 고된 여행길에서도 환상을 볼 정도로 절실합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공언하는 형을 피해 홀몸으로 도망쳐 사막에서 돌을 베고 잤던 20년 전과 비슷하지만 이젠 그에겐 지켜야 할 아내와 열둘이나 되는 자녀들까지 있으니 그 초조함과 공포는 그때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그 간절함이 그에게 두 번째 환상을 보게 합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대가족과 동행하는 길에 만난 '군대'라고 표현될만큼 대규모인 하나님의 사자들을 마치 야곱 혼자 본 것처럼 묘사한 점이 특이합니다. 마치 천년 후,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척살하기 위해 무리와 함께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이 혼자서만 예수의 환상을 봤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환상에 힘입어 야곱은 에서와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자신의 재산을 형에게 선물로 줄 결심을 합니다. 염소와 암양이 200, 낙타 30, 암소가 40마리 등이니 현대 가치로 계산해도 어마어마한 재산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야곱이 갈망했던 장자권은 사실 이 땅에서 물질적 복과 많은 자손을 얻는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생존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부과 가족은 축복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모든 가축을 에서에게 드리는 예물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종에게 맡겨 앞서 보내버립니다. 다음 날은 심지어 아내와 열한 명의 아들까지 앞서 강을 건너게 합니다. 저것들을 얻기 위해 야곱이 보였던 집요함, 노력을 생각하면 자포자기처럼 보일 정도의 행동입니다. 속세의 모든 연을 끊고 집을 나서는 수도자와 비슷한 어떤 내적 전환이 엿보이는 행동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모든 것을 떠나보낸 새벽, 광야에 홀로 남은 야곱은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태아 때부터 형의 발목을 잡았던 야곱의 집요함에 질린 '어떤 사람'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 어긋나게 하지만 아침이 밝을 때까지 야곱의 투지는 꺾이지 않고 오히려 종전의 조건으로 축복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야곱에게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다)'이라는 새 이름을 주고 야곱이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긴 자라고 인정합니다.


다른 신화와 종교에도 신에게 대항하거나 육탄전을 벌인 인간의 사례는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패배하거나 이겨도 처벌을 받는 사례가 대다수죠. 그러나 야곱은 자신이 싸움의 종료 조건으로 내건 축복을 받는데 성공했고 신으로부터도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많은 신화와 종교에서 신 혹은 신에 의한 고난은 인간의 한계와 불리한 생존 조건 즉, 운명 그 자체에 대한 비유입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강하고 능력이 뛰어나도 인간은 질병이나 노화, 스스로의 죄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 결정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홀로 서있는 야곱 앞의 운명도 뻔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뿐 아니라 운명의 실을 자아내는 신과 맞붙어 자신의 운명을 바꿔 냅니다. 어쩌면 이 싸움은 발목을 잡는 치졸하고 가련한 '야곱'이 아닌 새로운 정체성을 얻어내기 위한 싸움 같기도 합니다.


치열한 생존 투쟁에 적극적으로 임하며 때론 비도덕적인 술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내 몫의 땅과 재산을 얻어내는 기민함과 성실함,

하지만 때론 물질적 부요함을 한순간에 포기한 후 신과 독대하며 그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구도자적 면모,

마지막으로 신과 운명에 휩쓸리고 좌절하는 대신 때론 그와 논쟁하고 심지어 그와 몸싸움까지 불사하는 근성.


이런 인간에게 신이 비로소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고, 그의 자손들은 이 이름을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