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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신부의 순진>

등잔 밑이 어둡다.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코앞에 있음에도 보지 못 하는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왜 보지 못 하는가? 등잔 밑을 들추어 보면 될 일인데도 그러기는 커녕 등잔에 관심도 두질 않는다. 다른 어두운 곳을 비추려 사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비추려는 곳만을 보려는 탓에 등잔은 항상 그 수단으로만 여겨질 따름이다. 등잔 밑은 언제나 어둡다. 단편 추리소설집 <브라운 신부의 순진>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그 사실을, 등잔 밑의 역설이 무엇인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항상 놀라운 발상으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만 정작 자신에겐 이렇다 할 특색이 전혀 없는 브라운 신부의 설정 자체가 그렇다. 저자인 G.K. 체스터턴의 별명은 역설의 장인이다.


브라운 신부는 어떻게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가?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의 문화 안에서, 그의 수단은 당연하게도 추리이다. 이런 흔적이 있군요? 왜 이런 흔적이 남았을까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실과 저 사실을 비교해보면... 관찰로 얻어낸 증거들과 핵심 가설을 추려내는 소거법이야말로 탐정술의 정석이다. 그러나 브라운 신부의 추리는 그 자신을 막다른 길로 내몬다. 범인을 특정하기 위해 시야를 점점 좁혀가지만 밝혀진 또 다른 사실은 그곳엔 범인이 없다는 사실 뿐이다. 점점 좁아져 가는 시야는 오로지 그 좁은 영역만을 비춘다. 그러나 그 좁은 곳에 범인은 없다. 범인은 어디 있는가? 고작 한 자릿수에 불과한 시야각의 반대편에는 세 자릿수에 달하는 광활한 시야각이 펼쳐져 있다. 다시 또 그 넓은 세계에서 또 다른 추리의 과정을 반복해야 할까? 다시 또 시야를 좁힌 그곳에 범인이 있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관찰 가능한 사실들로 도출된 당연한 상식과 그 상식을 뒤집는 스토리텔링은 합리적으로 추론한 끝에 마주한 막다른 길의 의미를 재고하게 한다. 길은 막혀있다. 이제 어쩔 것인가? 뒤를 돌아볼까? 돌아간 곳에 있는 것이라곤 또 다른 갈랫길과 또 다른 막다른 길이 아닌가? 이러한 상황 자체가 또 다른 딜레마인 상황에서 브라운 신부는 어떻게 관점을 뒤집는가? 세속적이고 사회적인 죄를 추적하다 막다른 길에 봉착한 브라운 신부는 고개를 돌려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죄, 원죄, 그 근본적인 악의를 상기한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들어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인간의 악을 전혀 모를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단 말인가?”


범인은 사회가 가진 기본 전제를 악용한다. 신뢰를 토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비집고 들어간다. 질서정연한 사회 속에 독 한 방울을 떨어트려 시선을 돌린다. 인간이 가진 위선을 역이용하여 스스로를 의미 없는 존재로 위장한다. 그는 심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 모두가 자신을 무시하는 사이 범행을 저지르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인간의 악의야말로 추리라는 수단이 보지 못하는 어둠이라면, 범인은 자신을 쫒는 수사관의 이성마저 악용할 것이다. 우리는 등잔 밑을, 인간의 악의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에릭 호퍼가 <영혼의 연금술>에서 썼듯이, 인간의 악의라는 원죄를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여러 문제를 고려하는 것은 잘못이다. 브라운 신부는 사건의 전제 자체를 다시 고려해봄으로써, 즉 이 사건 자체와 관련된 죄악을 하나하나 되짚어 봄으로써 인간의 좁아진 시야를 버리고 원죄를 목격하신 하나님의 시야를 빌려온다. 인간의 죄악들을 긍정함으로써 다시 재편된 범죄의 세계는 그 진상을 스스로 드러낸다. 브라운 신부는 오직 자기 마음속의 악마를 재고하였을 뿐, 재고하는 능력이야말로 이성의 역할이다.


뭐가 문제였지? 플랑보는 거의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이성을 공격하지 않았나. 그건 잘못된 신학이라네


인간 정신의 맹점을 채워준다는 측면에서 기독교적 세계를 옹호하는 이 역설의 이야기꾼은 이성이라는 등불 밑에 깔린 어둠을 본다. 브라운 신부가 늘 자조하듯, 인간은 항상 막다른 길에 다다러서야 뒤를 돌아본다. 막다른 길에 다다러서야 관점을 바꾸는 브라운 신부의 어리석음은 그렇게 함으로써 관점을 바꿀 수 있는 현명함으로 나아간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설이다. <브라운 신부의 순진>은 막다른 길에 다다름으로써 생각의 방향을 바꾸고, 죄악을 긍정함으로써 그것들을 재고하게 만드는 역설의 이야기이다.


현명한 사람은 어디에다 나뭇잎을 숨긴다고 했나? 숲속이지. 만일 숲이 없다면 그는 숲을 만들려고 할 걸세. 죽은 이파리를 숨기고 싶다면 죽은 숲을 만들어야겠지. ... 시체를 숨겨야 한다면 그걸 숨길 수 있는 시체 더미를 만들 걸세.”


어떻게 이 모든 걸 알아냈습니까? 당신은 악마란 말입니까?”


저는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마음속에도 모든 악마가 들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