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3장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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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의식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유대인의 근원적 심리는 의외로 '차남 컴플렉스'라고 생각합니다.


장남 카인에게 살해된 아벨 대신 아담의 혈통을 이은 '셋'은 3남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아버지 데라의 차남 혹은 삼남으로 추정되며 장남 하란은 아브람이 고향을 떠날 때 이미 사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장남 이스마엘을 배제한 후에야 적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논하는 야곱 역시 에서를 배제한 차남이며, 요셉은 11남, 후에 예수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지파의 시조가 된 유다도 4남,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하는 모세 역시 아론의 동생이고, 다윗도 이새의 8번째 아들이며 솔로몬 역시 암논과 압살롬등 거의 10명에 가까운 형들 뒤에 태어났고 형들의 반역과 끔찍한 죽음 후에야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인간의 출생 순서에 따른 심리를 연구했던 아들러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유대인이었고 더군다나 차남이었다는 점도 공교롭습니다. 그가 분석한 차남의 심리는 '심리학'이란 이름을 붙이기 쑥스러울 정도로 상식적입니다. 첫째를 따라잡으려는 경쟁 지향적 성격, 장자 중심의 권위에 의문을 갖고 도전하려는 경향, 형에게 유리한 기존 규범 대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새로운 규범을 선호하고 이를 창조하려는 욕구 등이 그것이며 우리들 역시 자신과 주변의 사례에서 이런 유형의 차남들을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변화된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늘 자신보다 앞서가는 형을 능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장점도 있긴 합니다. 


야곱의 시점에서 에서는 고작 몇 초 일찍 태어났을 뿐인 주제에 형의 지위를 얻은데다 남자다움과 사냥 솜씨로 일찍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능력자였습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당한 방법으론 이길 수 없었기에 야곱은 발목을 잡고 어머니와 공모한 사기극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정하지도 살갑지도 않았던 라반 곁에서 머문 20년이란 시간의 길이는 어쩌면 야곱의 두려움과 망설임의 시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제 그 유예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형이 400명 이상의 장정과 함께 전투태세를 완비하고 야곱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2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야곱은 형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고, 

400명의 장정을 이끌 정도로 큰 권력과 성공을 이룬 에서 역시 허울 뿐인 장자권이라도 그걸 가로챈 동생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잊지 않았습니다. 


사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을 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동생의 은근한 멸시와 월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예상한 야곱은 앞서 말했듯 재산과 종, 레아와 그녀의 자녀, 라헬과 그 자녀를 먼저 보냅니다. 야곱이 청춘과 장년을 바쳐 얻으려 발버둥친 모든 소유를 형 에서의 처분에 맡긴 것입니다. 


이 다음 펼쳐지는 장면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창세기의 족보 내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차남들은 별다른 죄책감없이 장자를 무시하고 정죄하고 배제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를 섬기는 민족'의 가계도에서 밀려난 이들은 중동과 가나안 땅에 번성하여 끊임없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골칫거리, 우상숭배자, 기득권을 갖고 있으나 가질 자격 없는 이방인과 오랑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에서 앞에서 야곱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나아가고, 

그러자 그런 야곱 앞에서 에서는 '달려와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웁니다. 


이어지는 화해와 용서의 언어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야곱이 이 대화 중에 언급한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는 표현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또 한 번의 사기극일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20년의 인고 속에서 했을 지난 날에 대한 반추, 뻔한 운명을 이겨내려 다리의 관절이 꺾이도록 메달렸던 하나님과의 쟁투는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게 했고 본래의 경쟁 중심적인 시야와 세계관을 근본부터 바꾼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변화를 바탕으로 한 야곱의 진심어린 사죄와 형의 권위와 존재에 대한 인정 앞에서 에서의 분노는 정반대의 애정과 그리움, 연민이 됩니다. 에서도 이성과 감정과 영혼을 가진 인간입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야곱의 적의과 견제와 경멸은 에서에게도 상처와 고통이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사냥에 나서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했던 일,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겼을 때 아이처럼 울며 분노했던 일 등이 이를 반증합니다. 


에서는 악마도 이방인도, 야곱과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같은 아버지를 공유한 형제이고 대화할 수 있고 진심어린 사죄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작된 지 1년이 넘어가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호의적인 언론의 통계로도 4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은, 그중 최소 1만 명은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라는 하마스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야곱과 에서의 후손들 사이에서, 그들이 부둥켜 안았던 땅위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은 물론 세계적인 석학들도 모른다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해법이 다름 아닌 창세기의 야곱과 에서의 화해 속에 예언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엉터리 같은 소리일까요? 최소 2000년 전의 조상이 살았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전쟁 목표로 삼은 무장단체의 거두를 죽인 후에도 전쟁을 멈추지 않으며, 자신들의 진짜 목적은 선주민의 박멸임을 숨기지도 않는 어떤 민족의 주장보단 덜 황당한 듯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과 일부 기독교인들은 당연하다는 듯, 지금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방식은 창세기가 아닌 '여호수아'의 학살극 속에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흠이 없고 완벽하고 정의로운 절대자에게 '선택된 민족'의 생각일까요? 상대의 목을 물어뜯는 방식으로만 갈등을 해결하는 존재들을 우린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의 신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했고, 인간에게 이성을 선물로 주었으며 신의 완전함을 본받아 완전한 도덕성과 행실을 갖추길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상처입은 짐승처럼 예루살렘을 수호하려 바벨론과 로마 제국 앞에서 울부짖었던 이스라엘의 결과는 처절한 파괴와 패배였습니다. 글을 깨우치기 전부터 창세기를 읽었던 민족이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이 시대에도 창세기를 살아있게 한 것은 황당한 수명의 날조된 족보로 증명되는 알량한 우월의식이나 전쟁의 승리, 기적 따위가 아닙니다. 당대의 야만성과 이기심, 동물 수준의 증오와 갈등을 넘어선 규범과 이해와 용서를 통한 새롭고 아름다운 인간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창세기의 땅에 만족을 모르는 증오의 피 대신 성찰과 이해에 기초한 반성과 화해, 공존의 눈물이 흐를 날이 오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