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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평: 순수한 영혼이 잔혹함과 이른 사랑을 펼치고 있다.
여기, 한 순수한 영혼이 있다. 그 영혼은 책을 즐겨 읽으며 지식을 얻는 걸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친해지기가 어려웠던 그는, 그 외로운 마음을 책으로 채워야 했고, 자연스레 무언갈 충족할려는 욕구는 잡다한 지식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또 그는 그럴수록 말을 잘했다. 남들, 특히 어른들에게 작은 웃음이나 즐거움을 주는 농담이나 어투를 능숙하게 구상하고 말했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언어에 대한 흥미를 품기도 하고 세상을 자유롭게 보기도 했다.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엔 맞지 않는 꽤나 조숙한 영혼을 얻은 그였다.
이런 더할나위 없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였지만, 그의 육체는 영혼과 반대로 빠르게 늙어가기 시작했다. 조로증, 그가 처음으로 얻은 고난이자 마지막 까지 이어진 고난이었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이란 선고 속에서도 그는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부당함을 준 세상을 향해 친절한 웃음을 내진 않았다. 그가 웃음은 건내는 대상은 바로 자신에게 부당함을 준 세상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자신 만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피어나고, 순수함을 충족 시켜줄 수 있는 사랑들이 넘쳐나기에 그는 웃을 수 있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많은 고난과 시련이 온다 해도 그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드렸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지친 부모의 도망이든, 악화되는 병이든, 거짓말이든, 죽음이든. 그는 버티리라 자신했을지 모른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핼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에요."
(...)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
P.143
언젠가 그가 세상을 사랑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그가 자신의 희귀병을 이용해 방송에 출현했을 때, 메일로 '이서하'라는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였다. 그 둘은 서로 적은 진심이 담긴 메일들을 보내며 점차 호감을 쌓아왔다.
그는 처음에, 이런 호감들을 불안해 했다. 나에게 큰 비극을 안겨준 세상이 웬일로 나에게 이런 마음이 뛰는 낯선 고통을, 즐거운 고통을 주는 것일까? 그는 이런 아름다움에 처음엔 경계했지만, 점차 선명하게 보여지는 붉은 선에, 그는 그녀와 진심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경계까지 오고야 만다.
그는 이때, 그가 가진 모든 순수함을 쏟았을 것이다. 이때까지 능청하고 발랄하게 살아가면 쌓아온 순수함이었고, 그 순수함은 사랑을 몰랐다. 그리고 지금 이때, 순수함이 사랑이란 달콤한 약물에 빠졌을 때, 그는 중독되었고 그녀를 만나보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끝내 들어내기도 했다.
그 순간, 그는 행복했다. 사람들을 보고도 행복했고 세상도 얼떨결에 좋아하게 되었다. 신이, 신이 꼭 나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한 번 기적이 이행됐으면 싶었다.
답장을 보내진 않았다. 막상 책상 앞에 앉으니 겁이 났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어쩌면 내가 이 아이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그리고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무엇보다도 내겐..... 자격이 없어 보였다.
P.188
'하느님께서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는 내게서 뭔가 빼앗아가실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P. 221
끝끝내 신은 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으셨나 보다. 세상이 다 부서트린 그에게 남은 건 생명. 그리고 그 속을 감싸는 순수함. 신은 그것을 먼저 박살내기 위해 함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이때까지 사랑해왔던 존재는 여자애가 아닌, 36살의 무명 시나리오 작가였다.
한동안 사랑이란 묘약에서 물놀이를 하다 그렇게 익사한 순수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싸늘에게 생명만 남아있는 상황에 심장은 그리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덩달아 그도 변하기 시작했다. 순수함이 사라진 그는 나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을 악화시키시 시작했다.
세상을 다시 바라보아도, 이전에 활기가 넘쳤던 세상과는 다르게 이젠 싸늘한 바람과 시체의 냄새만 거리를 맴돌고 있었다. 이 모든 건 그저 일상이었다. 일상이었다....
그는 이때까지 순수의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었음을 순수가 죽고 난 다음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체념했다. 어른들에게 시시콜콜 날리던 능청스러운 농담도 사라졌고, 부모님에게 조숙한 모습을 보여준 그 예절도 이젠 사라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죽음의 공포 뿐이었다.
나는 어둠에서 풀려나 새 어둠에 갇혔고, 그걸 다시 다른 어둠으로 가렸다. 그러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으로 침잠해졌다. (...) 나는 내가 그 방에서 영원히 나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다시 일상..... 또 일상이었다.
P.290
그는 하루가 지날수록 악화되었고, 점차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했으나, 이젠 그에게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남은 짧은 시간에 순수를 그리워하기도 하며, 그와 같이 순수는 죽었으나 여전히 그에 비하면 건장하게 살아있는 장씨 할아버지와 오랜만에 즐겁게 대화하기도 한다.
점차 그의 눈망울엔 새로운 순수가 자라나기도 하지만, 그는 죽기 직전 실명한다. 그리고 자신이 예전에 써놓았던 소설을 부모님께 읽게 하고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생명의 불을 끈다. 보고 싶을 거라고.
*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한 없이 무기력하지만, 그 무기력 함을 부정할 순 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인 한아름이 그걸 보여준다. 그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밝고 순수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순수'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공포도 그저 즐거운 술래잡기로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순수라는 것이다. 주저할 수 없이 밀려오는 황당함과 그리움도, 모두 순수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인간이란 개인은 행복해지는 길이 있지만, 보통 우리는 그런 순수를 잘 받아들이기 어렵게 생각한다. 그리고 막상 충격적인 죽음이란 선고가 바로 내 앞에 펼쳐진다면, 불확실한 재앙이 바로 내 앞까지 왔다는 확정을 받게 된다면, 사람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에 휩싸인다.
순수따위를 기대하지 않는다. 현세의 삶에 찌든 개인들은 곧장 현실에선 억압되었던 단순한 욕구를 추구할려 들 것이다. 그들이 채우지 못했던 자유를 누리려 한다. 단지 시한부라는 훈장을 가지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이런 단순한 욕망 채우기가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짓거리라는 것을 인식한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임박하면 이러한 행동들은 인생을 보내는데 헛짓거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그저 마지막 소원을 행했을 뿐이고, 그들이 행복했다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리는 예정된 죽음 앞에서 하는 모든 행동이 허무하다고 느껴질지 모른다.
우리는 늘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른다. 그리고 죽음이 언제 올지 알고 앞으로의 행동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앞으로의 죽음을 인식함으로서 한가지 능력을 얻게 되는데, 바로 전엔 생기지 않았던 무모함이 생기게 된다.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죽는게."
"....?"
"자랑하는 거야. 벌벌 떨면서. 살아있다고 재는거지. 내가 좀 놀아봐서 알아."
P.206
소설 속 등장인물인 장씨 할아버지는 위험하게 오토바이를 타는 십대 청소년들이 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는지 묻는 대답에 이렇게 답했다. 인간이 수없이 많은 재앙을 맞닥뜨릴 때, 그들은 어떻게 자손을 이어가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가? 그건 바로 황폐 후에 오는 무모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통괄하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소돔에서 살아남은 롯의 가족들 중, 아내가 소금기둥이 된 이후 롯의 자손들은, 소돔의 자손들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 바로 그의 딸들이 그와 관계를 맺어 자손을 잇게 했다. 인간은 위기를 느끼면 그만큼의 무모함이 생기는 것이다.
그 용기는 어쩌면 행복을 낳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그 무모함이 무엇으로 변질될지 잘 모른다. 어쩌면 난 죽음을 선고받고도 평범하게 살겠다는 무모함과, 차마 행동할 수 없는 막장들을 하면서 살아갈거란 무모함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무모함을 정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생명이란 참 특이한 존재다. 특히 인간은 생명을 지닌 존재중 가장 특이하다. 누구나 자신들의 꿈을 가지고 그것을 무한하게 이루려 꿈꾼다. 자신의 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생명은 그 무한한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유한한 존재인데, 이런 점에서 우리는 현실과 심리에 충돌한다. 그 속에서 우린 절망을 느끼고 가까스로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익을 쫓는 존재로서 그 허무함 속에서도 작은 이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그 해답을 생각해내기도 했다. 키르케고르와 카뮈가 그러하듯.....
우린 늘 꿈을, 그러니까 한 없이 높고 또 이루면 또 계속 이루고 싶어하며 바뀌는 욕망의 덩어리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한 아이돌의 팬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맴버중 한 명을 만나보고 악수하는 것이 꿈이라 해보자.
만일 그가 가까스로 그걸 이루었다 해도 꿈은 바뀐다. 더 큰 것, 그 아이돌 맴버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라 바뀐다. 자신을 그걸 부정하면서도, 마음 속엔 괜사리 그것에 대한 소망이 점차 자라난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외의 상황들이 있지만, 대부분 그 꿈은 망가진다. 하지만 그는 그 꿈을 위해 노력했을지 모른다. 아이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몸을 가꾸었을지도, 예의를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꿈을 위해 꿈에 근접하게 접근했다.
꿈이란 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꿈에 가까스로 근접하는 것엔 의의가 있다. 누구나 이루어지지 않는 꿈에 상처받고 절망하지만, 우린 꿈에 다다르기 위한 단계들을 완성한 쾌감들을 느끼며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한계성 속에도 훌륭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루지 못한다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슬픔을 느끼는 것, 하지만 우리는 그 슬픔을 영원히 가지지 않고 스스로 이겨내며 다시 앞으로 나갈려는 그 욕망, 우리는 그것에 의의를 느끼는 것이다. 유한성 속에 무한성이 숨겨져 있다. 상처로 인해 남겨진 흉터는 우리를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니까.
소설 속 주인공도 그렇다. 주인공은 죽음이란 한계가 확실함에도 결코 절망과 손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과 공존하며, 이서하 라는 존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민감한 부분을 나누고 슬픔을 공유했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을 피워냈다. 슬픔으로 행복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네가 너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P. 50
인간은 한계 앞에서 한 없이 무기력하지만, 한계로 인해 오는 감정들을 부정할 순 있다. 그건 바로 인간의 특성이자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다. 그리고 인간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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