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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관련 글을 읽다 보면, 늘 하는 생각이 있다. 예전에 다른 책 서평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다시 한번 언급해 보겠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책임이 없다. 대신 자손에게 책임감이 박힌다." 뉘앙스는 언급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본질은 당사자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독일과 일본만 보아도 후손이 책임감을 언급했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기억은 조금씩 변형되고 있다. 과거 일본이 저질렀던 무시무시한 전쟁 범죄들은 조금씩 조금씩 '슬픈' 기억이 되고 있다. 뭐, 당사자들 그러니깐 자신들의 아버지와 아들이 겪었던 일이니 '슬픈'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주변국 특히 한국이 바라봤을 때는 쌍심지가 올라간다. 감히 너희들이 슬픔을 논해? 아마 이런 심정이지 않을까?
고등학생 시절 반에서 만화책 <맨발의 겐>이 유행했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친구끼리 돌려서 읽은 기억이 있다. 다들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봤던 것은 아니고, 공부 열기를 식히려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충격받았던 장면이 원자폭탄으로 일본 국민이 죽어가는 과정이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은 너무도 끔찍해서 다시는 핵투하는 일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러한 생각을 아버지에게 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그러한 것이 모두 일본이 스스로를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이라 말했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였다. 확실히 나도 <맨발의 겐>을 보고, 원폭 피해자를 '피해자'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아시아에 패악질을 부렸던 일본인이라 해도 그들은 나와 같은 일반 시민이 아닌가? 군인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생각에 꼬리잡기 하듯이 "그래도 당시 일본인은 조선인을 무시했고, 전쟁을 옹호했다."라는 생각이 뒤따라온다.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그러니깐, 우리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는 도대체 어떻게 계승 받아야 할까?
이번에 서평 할 '소명출판'의 서적은 <전후 일본, 기억의 역학>이다. "배움에 대한 물음을 품은 아이가 하나씩 물어보고 생각하면서 성장한다는 뜻을 담은 말."이라는 '포문당' 시리즈 네번째 책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일본 전후의 기억의 역사를 담고 있다. 쉽게 말해보자면,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기억이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에 대한 책이다. 전쟁 기억은 일본인 모두에게 일일이 물어볼 수 없는 노릇, 문화재와 콘텐츠를 통해 기억이 어떻게 계승되고 변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애당초 오늘날 말하는 '전쟁의 기억'이란 많은 망각을 거쳐서 맑게 보이는 '웃물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과거의 논의를 살펴보면, 현대 일본과는 다른 논의 전개도 많다. 베트남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가해 책임', '피해자 의식 비판'이 왕성히 논의되었는데, 이는 전쟁 체험을 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전쟁 체험을 거론하는 (혹은 그렇게 보이는 윗세대를) 비판하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전쟁 체험이 있는 세대는 자신이 말하기 어려운 체험을 안이하게 반전운동의 정치주의로 결부시키는 것을 거부했지만, 체험과 이를 둘러싼 자책과 회한에 집착하는 태도는 전사자를 미화하고 현창하는 경향, 나아가 전쟁 수행과 아시아 침략을 긍정하는 논의를 비판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사자 편에 서는 논의'와 '책임을 추궁하는 논의'는 오늘날처럼 꼭 이분법적 대립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전자에 대한 핵심을 파고드는 과정에서 후자의 주장이 만들어지는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무난한 내러티브'는 '기억의 계승'을 강조하면서도, 과거의 논의를 외면하고 모종의 '단절'을 재생산했다."
책에서 일본인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크게 세 가지 과정을 거쳤던 걸로 보인다. 외면 - 슬픔 - 미화. 너무 단순하게 요약했지만, 본인이 읽었을 때는 이렇게 느꼈다. 처음에는 미 군정의 눈치로 외면을 했다가 점점 유족들의 슬픔에 빠지고, 후에는 그들의 죽음을 단순히 슬퍼하지 않고 명예롭게 기억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저자가 지적했던 부분은 바로 무자비한 야스쿠니 신사다. 책의 1부는 "공간의 역학"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전쟁 관련 지역을 다룬다. '야스쿠니 신사', '지도리가후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지', '오키나와의 마부니'를 크게 다룬다. 그러면 저자가 야스쿠니의 어떤 점을 지적했을까?
"야스쿠니를 국가에서 보호하는 것은 국민 총체의 심리라고 하는 논법을 종종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개별 전사자의 심정, 심리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어 산자의 형편에 따라 죽은 자의 영혼의 모습을 마음대로 규제해 버리는 정치의 오만함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죽은 자가 드러낸 온갖 고뇌, 회의는 잘려나가고 봉쇄되어 버립니다."
"그 점에서는 죽은 자의 유념에 기대는 것의 연장에 야스쿠니 국가 수호에 대한 위화감이 담겨 있다. 죽은 자를 현창하는 것이 죽은 자의 고뇌와 회의를 깎아 없애게 한다. 하시카와 분조는 이러한 정치학을 국가호지운동 속에서 보고 있다."
야스쿠니를 둘러싼 전후 일본의 논쟁은 치열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인 징용 피해자들도 강제로 야스쿠니 신사에 영령으로 있다. 즉, 개인이 일본 또는 천황에 어떤 심정을 품고 있었는지 외면하고 신사에 영령으로 모셔졌다는 것이다. 사실, 전몰자들을 구분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부담스럽긴 하다. 그러나, 과연 전쟁 가해자인 국가가 나서서 유족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이러한 일을 했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특히, 식민지 피해를 입은 조선인을 강제로 야스쿠니에 넣어버린 일은 무언가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전후 초기의 야스쿠니신사는 반드시 '순국'의 정치주의 색채가 짙었던 것은 아니었다. 반전과 재군비 비판 때로는 전쟁 책임의 추궁과도 결부되면서 유족들이 고유의 죽은 자를 마주하며 사적 슬픔에 잠기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그 후 지워지면서 공적인 '순국', '호국'이 강조되게 되었다. 이로부터 국가호지운동이 구상되는 가운데 야스쿠니신사는 각종 정치단체, 종교단체의 비난을 초래했고, 야스쿠니신사가 놓인 장소는 정치주의화의 일로를 걸었다."
이러한 부분을 읽으면서, 일본은 자기들이 주장한 '대동아전쟁'을 정확히 정의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가 한 몸이 되어 서양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기치는 당시에는 밝아 보였지만, 결국 약소국과 개인을 지옥에 넣어버린 일이 되어버렸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개죽음'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순국'이라는 단어를 끌고 와서 야스쿠니를 정치화 시켜버린 것이다.
책은 이렇게 일본 전후의 기억을 보여준다. 히로시마의 원폭 돔 철거 반대와 찬성의 논의도 있고, 오키나와 마부니 지역을 둘러싼 기억 갈등도 있다. 본인이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제2부 "문화의 역학"이다. 특히 영화 <군기는 똥구덩이 아래에> 어떻게 이런 영화가 일본에서 만들어졌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영화는 '반전' 그 자체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반전도 되고, 상황이 반대로 된다는 의미에서도 반전도 된다.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면, "아름다운 유족을 똥구덩이 아래로." 볼 수 있겠다.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주인공의 남편은 남방 전선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남편이 탈영을 하다가 총살되었기에 군인 연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하지만, 남편의 탈영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정부의 문서가 없기 때문에 주인공은 믿지 않고 항의를 한다. 이에 대해서 연금 공단은 남편의 생존 전우를 찾아가서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조사해오면, 상황에 따라 지불 제한을 풀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생존 전우를 찾아간다.
이렇게만 보면, 슬픈 유족이 억울하게 탈영병이 된 남편의 원한을 푸는 내용인 것 같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숭고한 희생도 없고, 용기 있는 돌격도 없다. 제목이 아주 잘 보여준다. <군기는 똥구덩이 아래에>는 관람객이 기대하는 내용을 송두리째 거부한다. 탈영병이 된 남편? 그러면 앞으로 나와야 할 내용은 남편은 사실 탈영병이 아니고, 숭고한 희생을 한 병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군기는 똥구덩이 아래에>에서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다양한 예상이 뒤집히는 프로세스는 개봉 후 약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죽은 자에게 다가가는 듯한 미화가 반대로 죽은 자의 입을 막고, 조화로운 '계승'은 당사자들이 말하기 어려운 원한과 배경의 역사적 사실을 후경화한다. 이 영화는 관객의 예상을 비틀고 뒤집으면서 '전쟁 이야기'를 둘러싼 이러한 역설을 조명한다. 전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 '기억의 계승'에 대한 절박함은 많이 이야기하지만, 회의적인 시각이 결여된 채 사지나 경험자를 칭송하는 것은 오히려 망각을 부추길 뿐이다. 그것은 종종 증언을 억압해 온 '유족에 대한 배려'와 다를 바 없다. 유족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억을 둘러싼 '의리 없는 전쟁'을 그린 이 영화는 오늘날의 '계승'을 둘러싼 욕망도 비추고 있다."
저자의 기본적인 입장은 '기억의 계승 왜곡'에 있다. 전쟁에 대한 회의감, 군부와 천황에 대한 책임, 당시 일본인의 전쟁 찬양 등. 그러한 기억은 송두리째 없고, 슬픔과 미화 또는 숭고한 희생으로 기억이 왜곡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23년 말에 일본에서 가미카제를 다룬 영화 <그 꽃이 피는 언덕에서, 그대와 다시 만날 수 있다면>가 흥행했었다. 현대 가출 소녀가 태평양전쟁 시기로 타임 슬립해서 가미카제 대원과 로맨스를 다룬 영화다. 언뜻 보면, 전쟁에 회의적인 시각을 다루는 듯하지만 가미카제 대원의 희생을 강조하는 서사가 짙게 들어있다. 저자는 이러한 형식의 서사를 지적한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계승해야 할까? 저자도 정확하게 해법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저 개인에게 집중하고, 전쟁을 단순히 숭고한 희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올바른 기억이야말로 화해로 갈 수 있다.
포문당 시리즈를 처음 읽어 봤는데, 크게 어렵지도 않고 좋았다. 논문 모음집이지만, 관련된 논문끼리 크게 3부로 나누어 흐름도 이해하기 편했다. 일본 전후는 현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코스라 생각한다. 과거에는 전쟁 책임을 외쳤던 일본이 어쩌다가 지금의 일본으로 이어졌을까? 이러한 의문과 생각은 한국이 앞으로 일본을 대하는 자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적지는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다. 미디어와 그때그때의 사회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면서도, 참혹한 전쟁의 장소가 기념할 만한 곳으로 발견된다. 마부니라는 장소가 발견되고, 그 모뉴먼트에 다양한 의도와 욕망이 투영되어 온 전후의 역사 속에는, 본토와 오키나와의 뒤틀림과 함께 전적지라는 미디어의 역학이 드러나고 있다."
"삭발하는 것은 '전쟁에서의 일을 하루만이라도 떠올리려는 마음'이 근저에 있었다. 다만, 쓰루미는 '머리카락이 자라기까지 3개월 정도, 지금 시대에 녹아들지 않는 묘한 느낌이 찾아온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지 하고, 어쩔 수 없이 하루에도 여러 가지 시각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준법의 반사'를 부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1931년부터 1945년에 걸쳐 중국 침략으로 시작되는 15년간의 전쟁을 독려한 사람들은 패전이 되었음에도 현재도 그대로 일본 정부의 지도자로서 이 나라를 움직이고 있다. 이 사람들의 명령에 분명하게 서서 '싫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전쟁에 나갔을 때의 나 자신의 모습을 까까머리는 이제 다시 한번, 나에게 되돌려 준다. 까까머리, 벌거벗은 모습으로 징병관 앞에 섰을 때의 나, 그 무력한 나에게서 어느 만큼 지금, 떨어져 있는가? 펜으로 평화에 대해 현재 쓸 수 있다고 해도, 그런 것으로 그때의 무력한 내가 지금은 다른 내가 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마지못해, 불안한 벌거벗은 나를 내 안에 불러들여, 그러한 불안과 무력한 나인 채로 조금 더 분명하게, 이 무자비한 전쟁 세렉에게 돌아가길 원한다. - 쓰루미는 '형설시대' 1971년 8월 호에 모여진 에세이 '승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것은 종래의 '위령제'적인 '특공'의 서사와도 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기억'은 과거의 사회와 조직 병리를 파헤쳐 사고하는 것을 억제하고 '탈역사화'를 촉구해 왔다. 실제로 전우회, 유족회의 전적지 순례에 뿌리를 두고 있던 당시의 '현창'의 서사와 수학여행, 일반 관광을 전제로 한 '평화'의 서사는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역사적 배경에 다가서려는 사고를 억누른다는 점에서는 동등했다. 오히려 그때그때의 방문객에 맞춘 '편안함'과 '무난함'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일관적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위령제'든 '평화'든 모두 '탈역사화'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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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8gWdgwz_64?si=-b2PLemZ4XbWCq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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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유튜버가 <군기는 똥구덩이 아래에> 리뷰한거임!! 많은 생각을 하게된댜 - dc App
잘읽엇음 책도 읽고 싶어지네
책 쉽댜. 중간중간 번역체가 아쉽긴함. 내가 소개 안한 부분이 많아서 좀 아쉬움. 후쿠시마 원폭 돔 보존 찬반 싸움, 영화 <들불>, 가미카제 추모를 둘러싼 논쟁 등. 그리고 포문당 시리즈 책들을 보니 다 군침도는 것뿐... - dc App
일본인 두명이 일본, 한국, 동남아 목욕탕 탐방하는 책 생각나네. 목욕탕을 매개로 일본 과거를 돌아보는 기행문인데 재밌음.
오 뭔데 제목 - dc App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299398004
아리가또네 - dc App
굿 - dc App
옥쇄,신주불멸,천황 숭배 등의 민족적이고 전체적 요소에서 벗어나서 개개인의 희생과 슬픔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은 분명 일진보일테지만 확실히 석연찮은 부분도 있고, 역사를 처음으로 대면하는 세대 전반이 그런 미묘한 애상에 빠지면 확실히 식민 피지배국 입장에선 좀 좆같게 보이긴 하겠네요... 사족으로 제시된 전후 외면의 단계는 독일 또한 비슷했다고 어디서 들었는데
이후 세대가 능동적으로 전쟁을 재인식하는 과정이 확실히 일본의 시대적 흐름과는 다르다고 느껴지네요,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물 건너간 일이 아닐까 싶어도 아쉽긴 합니다.
“늑대의 시간”을 읽어보면 독일 전후가 잘 나타남. 독일 전쟁 직후에는 삶이 너무 지옥이라 전쟁 책임을 말하기 시간도 여유도 없었음. 전쟁 시대때 유년기를 지난 세대들이 자라서 말하기 시작 이것이 68혁명에서 잘나타나져. 일본도 초반에는 비슷비슷한데 조금은 달랐다고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전선과 남방전선의 차이, 중국전선 일본군은 지나인 조패다가 와서ㅜ왜 전쟁에 졌지? 라는 의문이 좀 있었다고 하고, 남방전선은 말 그대로 지옥을 겪고와서 전쟁에 대한 회의감이 강했다고 함 - dc App
아무튼 일본도 반전운동이 전공투 세대 들어서면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죠. 이후 시간 지나서 왜곡되고 했지만,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유럽도 왜곡 문제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다르긴 하죠. 예를 들어 유대인 홀로코스트 피해자 숫자가 과대포장 됐다는 식... 그리고 얼마전 올림픽에서 신유빈이랑 붙은 하야타 히나 선수가 가미카제 박물관 간다고 해서 비난일어닜는데,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한 가미카제 영화의 영향력 때문이라 함. 즉, 전쟁의 슬픔을 말하지만, 저변에는 자국에 대한 슬픈만 있죠.. 그래서 우리도 대응 해야함 불퍈러 같겠지만 계속해서 과거를 언급해야죠. 이번 한강 작가의 책처럼 나와야할텐데 ㅠ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