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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희대의 사기꾼, 어머니는 필자가 어렸을 때 출가, 필자 본인은 냉전시대의 외교관이자 스파이. ‘어린 시절은 작가의 통장 잔고다.’라는 (또 다른 스파이 작가) 그레이엄 그린의 말이 강력하게 증명되는 소설. 1권은 어렵다. 주인공의 유년 시절, 아버지가 벌인 희한한 사기 행각들이 익살스럽게 전개된다. 당시는 2차대전 전후로 혼란스러운 시기이고 아버지 릭은 사이비 교주처럼 행동하고 있다. 아들과는 거리가 있고 아들 매그너스는 전화를 통해, 아버지의 동료들을 통해 그의 근황을 전해 듣는다. 2권부터는 매그너스가 성장하여 스파이가 되는 내용이 이어진다. 배경은 주로 체코, 영국이다. 체코 독립을 두고 동구권과 서구의 암투가 함축적으로 그려진다.
인물 관계가 복잡하다. 매그너스를 조국의 배반자라고 생각하여 그를 추적하는 상관 잭 브러더후드와 매그너스의 아내이자 그녀 역시 스파이인 메리, 그리고 냉전의 정세를 논의하는 고위 공무원들. 그 중에서도 매그너스 본인이 가장 복잡한 정신 상태를 갖고 있다. 그는 소설가이고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그가 극중에서 쓰고 있는 회고록이다. 인물의 시점과 시제가 다소 불친절하게 전환되어 줄거리를 바로바로 따라 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이 작가는 스파이 문학의 그 자체이자 정수라는 사실은 느껴진다. 어렵지만 좀 더 찾아 읽어야겠다. 그 전에 냉전시대, 세계대전 등에 대해 배경지식이 좀 있어야 할듯..
문장들...
1권
그는 펜을 들고 종이를 한 장 준비했다. 그러곤 무엇이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몇 줄 끼적거렸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잭은 둔한 스파이가 된다. 양귀비, 양귀비는 벽에. 미스 더버는 반드시 크루즈를 가야 해, 좋은 빵을 먹어, 가엾은 리키가 죽었다. 리키티키 아버지. 손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줄을 그어 지운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가끔은 말이다, 톰,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 해 그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어. 가끔은 우리의 행동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 되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핌은 의리 있게 약속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이었다. 릭처럼 그는 여러 세상에서 동시에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딛고 서 있는 땅과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을 빼고는 모조리 잊어버리는 것이 요령이었다.
2권
바인더로 정리되어 있는 지침서와 서류철. <최고기밀, 주의〉라고 표시된 통신 지시문. 이건 핌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서류였다. 난 여기 물건을 빌리러 온 거야. 훔치러 온 게 아니야. 그는 서류 가방을 열어 군이 지급해 준 아그파 카메라를 꺼낸다. 렌즈 앞쪽에 30센티미터 길이의 측정용 체인이 고정되어 있다. 악셀이 가져온 원자료를 현장에서 곧바로 사진으로 찍어야 할 때도 핌은 이 카메라를 사용한다. 핌은 카메라를 책상 위에 설치한다. 난 이런 일을 하는 게 천성이야.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태초에 스파이가 있었다.
표지에 가위표로 지워진 〈척추동물>이라는 단어가 있는 파일에서 그는 디브인트 전투 서열을 선택한다. 이건 어차피 악셀이 아는 정보라고 그는 자신을 설득한다. 그래도 이 서류의 맨 위와 맨 아래에 인상적인 〈최고 기밀> 스탬프가 찍혀 있고, 이것이 진품임을 증명하는 스탬프도 하나 찍혀 있다. 네가 내 자유를 사랑하는 만큼 좋은 걸 가져다줘. 그는 서류를 한 번 사진으로 찍고, 한 번 더 찍는다. 그러고나니 들뜬 마음이 푸시시 가라앉은 것 같다. 이 필름으로는 서른여섯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럼 내가 굳이 필름을 아껴서 사진을 두 장만 가져다줄 이유가 없잖아?
잼겠농
르 카레 커리어는 딱 이 작품에서 정점을 찍고 끝난 거 같음 그 뒤로는 할리우드 영화화를 노린 듯한 작품들만 잔뜩..
데뷔작부터 스마일리의 사람들까지 읽었는데 이 소설도 다들 칭찬 일색인 거 보니 훌륭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