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b4dc2aecd71aa961b49be44183736d6f71510f66767262cc97a4d5e71b23c46a8cac9c167e2532


감성으로 체험하는 것은 ‘해석’이나 ‘이해’가 아니다.
결국 느낀 것을 언어화하는 것은 느낌의 일부만을 구체화한 것으로 전체의 이미지가 아니다.
이것은 그림이나 음악이라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언어에 의해 창작된 시나 소설도 마찬가지다.
언어로 표현돼 있어도 그것을 언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른바 평론가는 이런 일을 무리해서 한다.
잘못이라고 해도 그것을 원하는 일반 대중은 꽤 있다. 뭐든 좋으니 구체적인 해석이나 이해를 원한다. ‘모르는 것보다 낫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수요는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낫다. 추상적으로 대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언어에 의지한다. 모르는 채로 둘 수 없는 것은, 그것만으로 사고력이 쇠약해지고 단순화시키지 않으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불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알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사고정지라는 안정된 상태를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이미 죽어 있는’ 상태에 가깝다.

그렇다면 예술을 접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두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십중팔구 자신도 그런 알 수 없는 것을 만들어보자는 동기가 된다. 여기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결국 아름다운 것, 놀라운 것, 즉 감동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과 접하고 그저 ‘감동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학교에서는 독후감 같은 것을 아이에게 쓰게 하는데, ‘감동’을 언어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현재 독후감에는 대개 구체적인 줄거리를 쓴다). 독후감을 잘 쓰면 그만큼 예술가가 될 수 없다. ‘해석’이라는 단순화가 예술을 단순한 기술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인데, 예술가가 되었다고 해도 고작 이류다.


—생각의 보폭, 모리 히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