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붕이들은 조선 최고의 ‘영화이론가’ 혹은 ‘영화사가’로서의 임화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아는가?
보통 카프(KAPF) 운동 이후의 임화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화는 ‘조선영화’라는 한 신흥 예술 장르에 상당히 몰두한 인물이다. 임화는 1940년부터는 고려영화사에서, 1941년부터는 조선영화문화연구소에서 일하는 등 직접적으로 영화계에 관여하는 동시에, 조선 최초의 영화사(史)라고 할 수 있는 「조선영화발달소사」 (삼천리, 1941), 영화라는 매체의 발전 과정을 탁월하게 지목한 「조선영화의 제경향에 대하여(朝鮮映畵の諸傾向に就いて)」 (新興映畵, 1930), 가히 조선의 벤야민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기계미(機械美)」 (인문평론, 1940)와 「조선영화와 기술」 (매일신보, 1940) 등 독창적인 저술을 여럿 남기며 현재까지 한국영화사의 서술에 있어서 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임화가 1941년(춘추), 1942년(매일신보) 두 차례에 걸쳐 저술한 「조선영화론」에 주목하여, 임화란 인물이 생소한, 영화이론가로서의 임화는 더욱이 생소할 듯한 독붕이들에게 이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또한, 이 글은 임화 연구자인 연세대 국문학과 백문임 교수가 저술한 『임화의 영화』에 대한 어느 정도 독후감적인 성격의 글임을 밝혀둔다.
먼저 임화가 「조선영화론」을 저술하던 당시의 영화사적 배경을 짚어보자.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제국 일본은 전시체제에 돌입하며,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에 대한 노골적인 통제를 강화했다. 특히 영화에 관한 통제는 정도가 극히 심했는데, 1939년 4월 ‘일본영화법’을 공포하며 ‘국민문화’로서 국책영화의 제작을 강요하였고, 이 법률을 식민지 조선에 적용한 것이 1940년 8월에 시행된 ‘조선영화령’이다. 그들 스스로가 ‘신체제’라고 지칭한 이 법령에 의거하여, 일본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통칭 조영)’를 발족하며 조선 내 영화제작사를 단 하나의 회사로 통폐합하였고, 동시에 ‘조선영화배급사’를 발족하여 당시 41개에 달하던 배급사를 합쳐 배급의 일원화마저 추진함으로 식민 권력이 영화계 전반에 대하여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신체제에 대하여 <반도의 봄>이나 <조선해협> 등 조선영화계의 자생적인 저항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지만, 이 글에서는 넘어가자)
따라서 임화가 취한 자세는 ‘예술’로서의 (조선) 영화를 최선을 다해 옹호하며, 조선영화가 발생한 토양을 검토하며 그 존재론적 성격을 분명히 밝힘으로 당시 영화를 선전도구화-무기화하는 경향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리치오토 카누도가 영화를 제7의 예술로 정립한 것이 1923년이건만, 제국 일본의 관료들을 포함한 당대 동아시아 대중에게 아직 영화는 분명한 예술로 널리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영화는 예술이라기보단 오락, 예술이라기보단 취미, 예술이라기보단 강력한 선전·선동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술에 가까웠다. 가령 백문임 교수는 ‘일본영화법’이나 ‘조선영화령’ 등 일반적 예술 분야에서는 보기 힘든 이런 전반적인 통제 시도가 “기계예술인 영화에 의해 대중은 기계적으로 국민으로 만들어지고, 그러면서 총동원 제도라고 하는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라는 인식에 바탕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조선영화론」에서 임화는 이러한 인식에 맞서, “영화를 일반문화와 예술로부터 분리하려는 온당치 아니한 기도”를 비판하는 등 반복적으로 영화가 문학, 연극, 음악, 회화와 마찬가지로 근대 예술의 한 장르라는 점을 주장한다.
「조선영화론」에서 특기할 만한 지점은, 임화 본인이 저술한 「조선영화발달소사」 등 종래의 영화사 서술이 1919년에야 <의리적 구토>로 대표되는 연쇄극(키노 드라마)의 형식으로 영화사가 개시되었고, 그 이전의 활동사진을 감상만 하던 시기는 영화의 전사(前史)적 시대였다는 인식의 수정이다. (‘종래’라고 해봤자 식민지 시기 영화사 서술을 시도한 인물은 임화 자신뿐이지만 말이다) 임화가 주목하는 사실은 조선영화가 서구가 근 20년간 밟아온 초기 영화의 전개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연쇄극이 곧바로 <춘향전>과 같은(임화는 윤백남의 <월화의 맹서>를 '영화'로 인정하지 않았다) 장편 극영화의 제작으로 이어졌다는 비약 혹은 도약이다.
이 지점에서 대다수의 독붕이들도 들어는 보았을 임화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 도래한다. 조선에 있어서, “문학과 연극과 미술과 음악이 제작했다는 것은 초창기에 있어서는 일종에 감상에 불과”했으며, “그들의 제작은 순연한 왜래 문화의 모방행위에 지나지 아니”하였기에, “그들은 모방함으로써 이식한 것이다.” 이 “몰아적인 기다란 모방의 시대는 영화에 있어 제작하지 않은 감상만의 시대에 필적”하며, “영화는 단지 감상하는 것만으로 활동사진을 이식한 것이다.” 즉 여기서 임화는 감상을 제작의 차원으로 격상시키며, 이 오랜 감상의 과정을 통하여 경험한 서구영화가 조선에 “이식”되어 조선영화만의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할 수 있었음을 주장한다. 이 조선영화의 (탈식민주의적 의미로서의) 근원적 ‘혼종성(混種性)’이야말로 임화가 강조하는 조선영화의 특수성이다.
임화는 조선영화의 “조선의 문학이나 그타의 예술에 의존한 것 이상으로 외국영화에 의존해왔으나 결코 거기에 침윤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뒤섞임으로써 성장했다”는 이 혼종성을 “일본영화보다 훨씬 이질적인 물건을 만들” 수 있었던 원인으로 지목하며(물론 조선영화가 정말 일본영화보다 이질적이었는가는 고찰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본인은 이 서술에 동의한다), 이를 “성육되어야 할 장점”이며 “발전여하로서 장래 조선영화의 가장 독자적인 성격 내지는 가치있는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많은 한국영화사가들이나 비평가들이 주목하는 것이 한국영화 자체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이 임화의 혼종성 개념이다. 그러한 비평가의 대표격에 위치한 유운성은 이 혼종성을 한국 대중문화 전체로 확장시키며, “장르를 무작위로 넘나드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작품에서 발견될 만큼 아주 뿌리 깊은 것”임을 지적한다. (예를 들자면 <극한직업>이나 <신과 함께>와 같은 대표적인 충무로 대중영화 혹은 최근의 K-POP 곡들 내에 얼마나 많은 장르가 동시에 존재하는가를 떠올려보라)
유운성에 의하면, 김기영은 “이 부정교합 자체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미학화”했고, 임권택은 “어떤 외국영화나 여타 예술에도 거의 의존하지 않으면서 한국영화의 형식이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실험”하였으며(임화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한국영화사에 있어서 <춘향뎐>은 동시대나 후대와 아무런 연결고리도 지니지 못한 채 단독적으로 고립되어 버렸다), 봉준호는 “한국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와 관련된 모순을 해결하거나 극복하거나 우회하는 대신 아예 모순 자체를 형식화해 버리는 방법”을 통하여(카이에 뒤 시네마의 널리 알려진 표현에 따르자면 ‘삑사리의 예술’로도 정의할 수 있겠다) 그의 독창적인 영화들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한국문학사 서술에 있어서 임화의 ‘이식문학론’은 식민사관과 연계되어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는 개념일지 모르나, 상술함과 같이 한국영화사 서술에 있어서는 하나의 타당한 독법을 제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또한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2024년 한국영화 100선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한국영화계가 한국영화의 기원과 그 특질에 대하여 스스로 망각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를 정확히 지목하고 있는 임화의 「조선영화론」을 (다시) 호명하는 것은 어느 정도 시사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글이 독붕이들이 임화라는 인물을 재인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임화의 영화이론이 더 궁금한 독붕이들은 이 글의 바탕이 된 책인 백문임 교수의 『임화의 영화』나, 윗 단락에 인용한 유운성 평론가의 <기생충> 비평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외에도 『동아시아 지식인의 대화』라는 책에 수록된, 이 글과 같은 관점에 일부 비판적인 시선을 표하는 한국영화사가 스미스대 손이레 교수의 「도래(해야)하는 식민지 조선영화의 고유성: 임화의 조선영화론 재고」를 참조하면 더욱 좋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막타쳤다 후
이식문학론에 대한 요즘 문학계의 관점은 많이 다르긴해요
최근 문학계의 이식문학론 인식을 조금 가르쳐주실 수 있으실까요
국문학사의 고전이 서구의 문학을 이식하는 데에 매개체가 되어주어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녔었다는 연구가 기억에 남네요. 이거 말고도 물론 당대 서구주의적 세계관의 한계는 있지만 조선문학의 고유성을 중시했다는 평가가 많아요.
아하 영화는 그 고전이 없었기 때문에(특히 임화가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연극적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더 명확히 이식론적인 성격을 내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해석이네요...!!
영화 비평가로서의 임화가 많이 주목받는 거 같긴 하더라. 전에 <문학사를 부수는 문학사>인가 거기서도 얘기 나오던데
아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다
오 천정환 권보드래 백문임.. 라인업 빵빵하네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