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5장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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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가문의 유랑은 계속됩니다. 그때마다 반복되는 여호와의 정착과 번성의 약속.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그 약속의 실현을 기다리다 하나둘 늙어 죽어 갑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벧엘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 이주 후 리브가의 유모가 죽고, 라헬이 죽고, 이삭이 죽습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을 피해 도망치던 날, 라헬이 숨겼던 우상 드라빔은 그동안 계속 야곱의 집 안에 있었고 심지어 그 수도 늘어났습니다. 이주 직전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는 야곱의 명령과 이에 따르는 가족이 복수로 표현되는 대목을 보면 고작 두 세대 정도의 가족 공동체 안에서도 우상 숭배를 뿌리 뽑는 것은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에 의해 다시 반복되는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 수여식과 축복은 이제 지리멸렬한 느낌을 줍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새 이름을 받은 직후는 물론, 두 번째 약속을 받은 35장 이후에도 야곱이란 옛 호칭은 37장 초반까지 계속 등장합니다. 

성서무오설의 주창자들은 이 오류를 '아브라함의 신앙적 변화는 단 번에 이뤄졌으나 야곱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뤄졌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겠지만, 탁자에 흩뿌려진 쌀알들의 패턴에서 미래를 읽는 식의 조잡하고 무리한 억지입니다. 새 이름을 받은 아브라함은 두 번째로 이방인의 왕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냈습니다. 아브람이라 불릴 때와 똑같은 행동이니 가부장 이상의 권력이나 힘, 지혜를 보였거나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볼 여지도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대목에도 신앙적, 존재적 변화나 발전은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황당한 것은 35장에서 갑자기 '이스라엘'이라 불린 부분은 큰아들이 자신의 첩과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참는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호칭이 이스라엘로 통일되는 37장의 행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어린 동생 요셉을 시기해 노예상에게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겐 동생이 죽었다고 둘러댑니다. 자녀들의 월권과 불화와 간계도 이기지 못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과 겨뤄 이겼다'는 이름은 여전히 너무 거창합니다. 

이 한심한 오류와 무성의한 서술의 이유는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을 작성한 저자의 관심은 야곱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여전히 발 붙일 곳 없는 유랑민이어야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고, 가족 전체가 기근을 이길 수 없어 이집트에 양식을 구걸하러 갔다가 이집트에 복속되는 빌드 업이 가능합니다. 출애굽의 클라이막스 효과의 최대화를 위해선 야곱은 뚜렷한 성취는 물론 앞서 상세히 묘사된 세겜의 성범죄자만큼의 육성과 내면 묘사도 없는 기능적 인물로 전락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문득 이 지루하고 잔혹한 시행착오의 장을 헤매는 야곱의 내면을 상상해 봅니다. 

자꾸 미뤄지는 약속을 믿고, 가족의 우상 숭배를 용인하며, 14년의 노동으로 얻은 사랑했던 아내가 노산 끝에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 지은 후 죽는 모습과 그토록 인정과 축복을 바랐던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자녀들의 패륜과 불화를 모른 척하며, 때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때론 가축을 먹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중동의 사막을 방랑하는 한 노쇠한 인간의 모습. 

그의 힘없이 벌어진 입안으로 파고드는 모래 바람의 메마르고 까슬거리는 미각이 느껴질 듯합니다. 절망할 여력조차 없어 매달리는 믿음의 촉감도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