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그는 누구인가』 -제바스티안 하프너

마음 속 깊이 겁을 먹은 사람들은 아무리 절망에 빠져도 결코 저항하는 일이 없다. 이에 덧붙여 정권의 실적이 더해지면 그들은 더욱더 그 고마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히틀러의 실적과 성공을 나눈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실적은 개인의 힘이다. 그러나 성공은 언제나 상대방이 있다. 나의 성공은 상대방의 실패이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 바로 대량 학살을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 국민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년에 걸쳐 그토록 반유대주의 선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국민은 유대인의 대량 학살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인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지배 민족'으로 만들 꿈을 꾸었는데 국민은 그 기대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좋다. 이런 국민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 역시 사죄가 어울린다. 이것이 히틀러가 내린 마지막 결단이었다.

『나의 투쟁이란 무엇인가』 -앙투안 비트킨

"그렇다기보다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해할 수는 있었죠. 읽으면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정하려 하지 않은 거죠. 앞으로 일어날 일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치부해 버린 거죠."

독일국민이 그랬듯이 그리고 히틀러와 적대하는 사람들이 그랬듯이, 유대인들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만천하에 드러난 음모'를 눈앞에서 마주했으리라.

이 의문은 역사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도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1933년 이전에 『나의 투쟁』을 읽었다는 것은, 즉 독일 정부를 떠맡게 된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이는 독일 국민 전체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이며, 국경을 넘은 100만 명의 '독자'에 대한 외침이기도 했다.

성서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하지만 장대하다. 문장의 반복도 많다. 게다가 신앙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성서는 지루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집중하게 하는, 살아있는 서적인 것이다.

무관심, 아니 오히려 폭력에 익숙해지고 물질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이, 알고 싶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 이다.

히틀러의 방식은 너무 심했다고 하면서도 55~65 퍼센트가 우수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으며, 33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다른 민족과 동등한 권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응답했다.(중략) 그러나『나의 투쟁』에 쓰인 사상이 독일 국민에게 충분히 스며들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가 처칠과 같은 '진실로 현실적인 정치가' 였다면 실현가능성이 매우 낮은 유럽-러시아의 점령과 같은 망상에 가까운 대외정책은 결코 말하지 않았을 테고 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에는 만행을 뿌리 뽑을 힘이 없다. 나치즘은 민주주의의 결함에 편승함으로써 힘을 얻었다.

하지만 나치스에게 가장 먼저 빼앗긴 것은 생명이 아니다. 바로 자유로운 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