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들뢰즈의 명언이라며 인용하지만, 원출처인 <시네마 II 시간-이미지>를 보면 늬앙스가 다름
"현대적 사실이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 죽음과 같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조차, 마치 이것들이 우리와는 반쯤만 연루되어 있기라도 하는 양 믿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아니며, 세계 자체가 우리에게 하나의 나쁜 영화처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논의를 펼침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이제는 이 관계가 바로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만한다. 그것은 신앙 속에서만 다시 회복될 수 있는 불가능성이다. 믿음은 더이상 또 다른 어떤 세계, 혹은 변혁된 어떤 세계에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마치 순수한 시지각적, 음향적 상황에 존재하듯 세계 내에 존재하고 있다. 인간에게 박탈되어버린 세계에 대한 반응은 믿음만이 대체할수 있다.
단지 세계에 대한 믿음만이 인간을 그가 보고 듣는 것과 다시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세계를 찍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관계인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찍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영화적 환상의 본성에 대해 자문하고는 했다. 우리에게 다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영화의 힘이다(나쁜 영화가 되기를 그칠 때 말이다). 기독교인이건 무신론자건 우리는 우리의 보편적인 정신분열증 속에서 이 세계를 믿어야 할 이유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믿음 그 자체의 개종이라 할 수있는 것이다. 이미 파스칼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철학의 거대한 전환이 있었다. 즉 앎의 모델을 믿음으로 대체할 것. 그러나 믿음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의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 될 때에만 비로소 앎을 대체한다."
흥미롭게도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들뢰즈의 발언이라며 퍼뜨린
"타락한 정보가 있는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
도 미묘한 늬앙스 차이와 함께 <시네마 II>의 논의와 비슷한 귀결로 흘러감
원출처인 네그리와의 대담을 보면,
"당신(네그리)은 통제 혹은 소통의 사회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횡단적 조직'으로 고안된 꼬뮤니즘에 새로운 기회가 될 저항의 형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소수가 말을 되찾을 수 있는 만큼 더 가능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la parole과 소통은 썩어 있어요. 그것들은 완전히 돈으로 물들어 있죠. 우연히 그런게 아니라 본성이 그래요. 우회가 필요합니다. 창조하는 것은 언제나 소통하는 것과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비-소통의 기공vacuoles, 곧 차단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윽고 다음과 함께 대담을 마침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세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완전히 박탈당했죠. 세계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작더라도 통제를 피하는 사건을 촉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또한 아무리 축소된 표현 혹은 부피의 것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시-공간을 탄생시키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피에타라고 부른 것입니다. 저항의 능력 혹은 반대로 통제에의 예속은 이러한 시도들 각각의 차원에서 판단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신지영 교수 책에선 들뢰즈가 촉구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은 그의 흄론과 연결되며, 이것이 들뢰즈 정치철학 해석의 실마리라는 주장을 펼쳐 재밌었음
요컨대 '공감'과 '편파성'이라는 자연적 본성이 어떻게 일반이해를 추출하고 공감을 확산시키는가라는 정치사회적 질문에서 "어떻게"를 담당하는게 '믿음'이라는 것
영미권에서는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와 <시네마>에서 언급하는 키에르케고르와 엮어보는 시도도 있던데, 이쪽도 좀 흥미로워 보임...
세계에 참가못하는사람의 단말마같네
개추 박는다. 들뢰즈 입문서부터 플차 좀 써봐ㄱㄱ
파이어펀치인줄 알고 들어왔는데 - dc App
카페 느와르인줄 알고 들어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