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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읽어본 바슐라르 저서다. 그래서 이해도가 상당히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바슐라르가 어떤 사람인지는 확실히 느낌이 왔다. 사실 바슐라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는, 문학에서 '공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공간의 시학>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평을 보고 눈여겨 두었다가 이제야 읽은 것에 가깝다. 그 점에서는 소득을 거뒀냐 하면, 그것도 충분히 거둔 것 같다. 최소한 예전에 블랑쇼나 베케트 같은 프랑스 저자의 글을 읽을 때 공간을 매우 중립적이고 무색무취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걸 이해했으니까. 공간은 그보다는 늘 무언가와 관계된,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상상력으로 피어오르는 이미지에 가깝다. <공간의> 전체가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공간의>는 먼저 우리가 문학을 읽으며 같은 것을 떠올리지는 못하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있으리라는 점에 착안한다. 한 사람이 자신이 예전에 살았던 단란한 집의 풍경을 아무리 자세하게 하더라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 집을 알 수 없다. 사진을 찍어서 보여준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한때 살았던 집에서 느껴지는 여러 느낌과 향수, 안심 등의 감정은 자세한 묘사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 자신의 상상력에서부터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옛 집을 묘사하는 저자는 그 집만의 특이한 점을 우리한테 전달하려 하기보다는, 우리 역시 우리의 옛 집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를 어떤 인상이 우리 안에서 솟구쳐 오르도록 유도한다. 어떤 점에서 이런 시도는 현대 인터넷에서 베이퍼웨이브, 위어드코어 등이 시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바슐라르는 그것이 우리가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기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의 현상이 아니라고 본다. 반대로 바슐라르는 그 현상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지를 이런 기억 또는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적) 개념틀 밖에서, 그 감각 그대로 느껴보도록 권유한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집이라는 이미지에서 안락함을, 불안한 밖과는 다른 안의 안정감을, 하늘을 찌르는 지붕을 얹은 다락방의 온건한 불안함과 집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 불길한 지하의 대조를, 요란스러운 바람과 모든 변화를 무로 돌리는 장엄한 눈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작은 집 안에서 나즈막히 켠 불꽃 하나 앞에서 느끼는 고조를 자연스럽게 펼쳐 보이도록. 태어나기 전 자궁 속에 감싸여 있을 때의 안락함을 그리워하는 요나 컴플렉스가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지, 자그마한 구석이나 드넓은 벌판이나 자기 안의 무한이나 안밖의 경계 앞에서 느끼는 정서가 어찌나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끌어올려지는지를 여러 예시와 함께 설파한다.


곧, 바슐라르는 우리가 여러 공간에 대해 갖고 있는 원형을 추구하며 이러한 원형이 어떻게 우리가 학문을 만드는 방향성이 되었는지를 보여주고-어째서 중세의 동물학은 지금 보기에는 전혀 달라보이는 두 동물 사이의 유비성을 보았는가?-문학을 읽으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그 정교한 구조도(완벽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수많은 시가 그럼에도 마음속에 울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이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의미도(당대 현실이나 심층심리의 진리를 엿보여주기 때문에 글을 좋아하는가?) 아니라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안에서 이미지의 원형을 자극해 유도되는 어떤 상상의 매력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건 확실히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읽는 이에 따라서 너무 임의적이라고까지 느껴질 어려운 길을 걸으며 여러 공간에 대한 원형을 통해 문학에서 상상력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아쉬운 것은 이런 종류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이론이 늘 그렇듯, 사실 서구 문화권 밖에서는 그리 보편적이지 않을 듯한 여러 '원형'이 있어 이게 인간의 원형이라기보다는 어떤 문화의 원형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준다는 점이리라. 우리의 옛 고사에서도 드러나는 여러 공간 이미지가 주장에 맞게 잘 조응되는 것과는 달리-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듯한 눈 내린 산골에 있는 작은 집 가운데에서 어둠을 불꽃 하나로 내쫓는 모습은 참 익숙하다-집의 구조, 특히 지하실과 다락방 사이의 변증법이나 누구나 집을 지으면 이렇게 지으리라는 가정 하에 논해지는 내용은 그리 공감이 되질 않는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될 수 있다는 팽창의 이미지가 있는 것과는 달리 그 역은 곧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마찬가지인데, <서유기> 같은 여러 설화 덕에 우리는 어떤 거대한 것이 매우 작은 공간으로 구겨져 들어가는 이미지에 익숙하다. 우리에게 팽창은 성장과 거리가 먼 이미지다. 물론 이런 한계가 서구 문화권의 매체를 접할 때에야 아무 상관이 없으니 괜찮기는 하지만, 바슐라르에게 제대로 설득되기에는 영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