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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은 정신 지체 장애가 있는 주인공 찰리 고든이, 지능이 상승하게되는 뇌 수술을 받게되며 일어나는 변화와 행복, 고통을 일기형식으로 서술한 소설이다.

주인공 찰리는 낮은 지능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으면서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마냥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찰리에게 지능을 높이는 수술 제안이 왔고, 찰리는 기대하며 수술을 받게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찰리는 똑똑해지면 더 행복할 거라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수술을 받은 후, 그가 평생동안 믿었던 세상이 부서졌다.
차가운 주변의 시선과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어버렸고, 찰리의 변화에 주변사람들은 점점 그를 두려워하게된다.
결국 지능이 높아졌어도 역시나 그는 여전히 고립된 존재였던 것이다.

찰리는 자신의 고립과 외로움을 깨닫고 고통에 빠진다.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어 생긴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지능이 낮을 적의 그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행복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닐까?
그럼에도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본 철학자들 중에도 행복하게 살다 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찰리는 스스로도, 환경도 너무 변화가 빠른 나머지, 행복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지능이 낮았을 때의 찰리도 엄연히 한 사람이었지만 다들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보지않았다. 여태까지의 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능이 높아지게 된 찰리는 그 사실을 알게되자 분개하지만, 찰리 스스로도 눈치채지만 못할 뿐, 찰리도 과거의 자신을 현재와 별개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을 공유하는 타인, 아예 다른 자아가 된 것 처럼 말이다.

자아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지능의 상승을 뇌의 발달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뇌의 발달을 자아가 성숙해져가는 것이라고 가정해본다.
최근에 사촌동생들을 봤을때, 나는 동생들을 여전히 친근하게 기억했지만, 동생들은 나를 어색하게 대한다. 분명 옛날엔 친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자아가 형성된 후와 되기 전은 분명히 사고하는 방식이 다른 타인은 아닐까? 기억을 공유할 뿐인 타인. 그래서 사촌동생들은 나를 어색하게 여긴 것이 아닐까.

타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테세우스의 배와 같지 않을까 싶다.
망가진 곳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다보니 어느새 기존의 부품은 아예 없어져있는 것과 같은 것.

그리고 나도 살아가며 계속 자아의 변화를 겪고있다. 몇 달 전과의 나와 지금의 나도 과연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변화라는것은 꼭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아도, 그럼에도 나는 변화 그 자체가 아름답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변화하지 않는 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찰리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찰리가 받은 뇌 수술은 부작용이 없는 수술이 아니었다. 지능을 일시적으로만 상승시켜주는 것이었다. 이 수술은 찰리를 대상으로 하기 이전에 '앨저넌'이라는 쥐를 대상으로 진행한 적이 있었다. 같은 수술을 받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앨저넌은 찰리와 운명을 공유하는 존재다.

수술을 받기 전 찰리는 수술을 받은 앨저넌이 자신보다 똑똑한 것을 보고 자신도 똑똑해질 수 있단 희망을 품었고, 수술을 받고나서는 점점 똑똑해진다는 것을 앨저넌과의 비교로 실감했다.

그리고, 수술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앨저넌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앨저넌은 점점 지능이 퇴화해가며 죽었고, 그 모습을 보며 찰리는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찰리는 점점 지능이 퇴화해갔다. 자신이 쓴 논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맞춤법도 흐트러졌다. 자신이 예전과 같아져간다는 것을 두려워하며 어떻게든 막아보려 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찰리는 스스로 지적장애인 보호소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찰리는 일기에 글을 남긴다. 그는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말아달라고, 똑똑해져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기뻤다고 한다. 보호소에 책을 몇 권 가져갈건데, 계속 읽다보면 분명 다시 똑똑해질 수 있을거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앨저넌의 무덤에 꽃을 놓아달라고 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분명 찰리는 똑똑해진 후 그렇게나 많은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그런데도 왜 다시 똑똑해지고 싶어하는 것일까.
동시에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해본다. 왜냐하면 나도 찰리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 멍청한데다, 좀 더 똑똑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찰리는 고통 속에서도 행복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다시 느끼고 싶어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다. 똑똑해지기까지의 과정도, 똑똑해진 후도 분명 고통이 따르겠지만 나 또한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본연의 갈망일지도 모르겠다.








이거 학교 독후감상문대회에 낼건데 참가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