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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장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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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은 종합되어 전체를 이루고 전체는 다시 부분을 규정합니다.


고사리와 브로콜리, 번개와 강의 줄기와 지류의 모양 등이 그러하고 인간과 그들이 꾸린 공동체 혹은 개인의 삶과 그것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역사도 그렇습니다.


<오딧세이아>는 그리스 반도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연안을 무대로 활약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실제 삶의 반영입니다. 반대로 힌두교의 냉혹한 카스트 제도와 윤회 사상은 소수의 아리아인들이 절대다수의 인도 대륙 토착민을 4000년 이상 지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한 개인의 삶 혹은 그의 개인적 이상과 목표라도 이것이 전설이나 신화 혹은 종교적 경전이 된다면, 이는 곧 민족의 특질에 이은 역사가 되고 이는 다시 민족 구성원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아벨, 노아, 아브라함의 경우도 비슷하지만 37장에 등장하는 요셉은 고난의 극복과 승리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국가를 이루기 전 유대인들의 고단했던 삶과, 그들이 꿈꾸던 개인과 민족 전체의 지향점을 담은 이야기라 볼 수 있습니다.


A. 기득권, 세속적 능력을 갖지 못한 누군가가

(요셉은 차남 정도가 아닌 11남입니다)


B. 신에 대한 믿음, 혹은 신의 임의적 선택이나 그에 대한 질투 때문에 기득권을 가진 선주민이나 이방 민족, 형들에게 고난을 받다가


C. 큰 승리를 얻어 신이 주기로 약속했던 땅, 지위, 재산 등을 얻음


이는 창세기는 물론 구약 성서 전체 속 주요 인물의 삶, 심지어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도 담을 수 있을 만한 서사구조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미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이야기되었던 위 서사가 아닌, 이 서사를 위해 꾸준히 소외되어 온 조연과 배경을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의식적 언행으로도 그를 이해할 수 있지만, 무의식적 실수나 취중의 행동을 통해 심리 이면과 심층의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 같은 성서의 주요 인물, 프로타고니스트들이 아닌 그를 대적하는 조연과 배경 등의 안타고니스트들에 대한 탐구는 어쩌면 창세기의 저자나 유대인들의 의식 깊은 곳에 대한 통찰을 줄지도 모릅니다.


카인이 살인자가 된 계기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노아의 발밑에서 익사 당한 당대의 전 인류에게 회개와 구원의 기회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주변에는 아내를 빼앗는 파라오와 아비멜렉을 포함한 수많은 이민족의 왕들과 이방인들이 우글거렸으나, 그들은 모두 여호와가 자신을 드러내자 이에 순종할 정도로 여호와 신앙에 호의적이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신앙을 전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여주인 사라의 강요로 아브라함과 동침하고 임신했다는 죄로 두 번이나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서도 친어머니와 친동생의 사기극에 의해 당연한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장자권을 얼마나 갈망했고 그걸 빼앗긴 후 얼마나 절망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앞에 나타난 동생 야곱을 얼마나 쉽게 용서했는지도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요셉을 죽이려다 노예 상인에게 팔아치운 형들의 행동은 변호가 불가능할 정도의 악행입니다. 하지만 37장 2절은 그들이 천륜을 어긴 나름의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요셉)가 그들(10명의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17세가 된 후에도 색동옷을 입고 아버지 곁에서 재롱을 피울 뿐이었으나, 형들은 모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목축을 합니다. 야곱이 그렇게 사랑하는 요셉을 직접 보내 안위를 확인하려 한 것을 보면 10명의 형들이 하는 일과 환경의 힘듦과 위험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헌신과 바람직한 근무 태도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그들이 야곱에게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은 땅이나 돈이 아닌 그들 손의 가축 뿐입니다. 게다가 그들 중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상속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레아와 라헬의 적자도 있지만 어머니들의 종인 빌하와 실바의 아들도 있습니다. 장남부터 6남 스불론까지는 레아의 적자이나, 7남과 8남은 라헬의 여종, 9남과 10남은 레아의 여종의 자녀입니다. 역시 야곱의 레아에 대한 노골적 차별과 그 와중에도 '족보'는 안정적으로 잇고 싶었던 탐욕이 낳은 모순적 결과. 게다가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이 고작 2세대 전이었고, 적서 차별은 당대의 흔한 풍습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11형제 사이에 흐르는 절박한 긴장감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태어난,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인 라헬의 유일한 적자인 동생이, 일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품에서 뛰놀며, 매일 같이 아버지의 귓속에 자신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목축 말곤 생존의 방법이 없는 환경 속, 아직 무리를 이루지도 못했고 주변의 이방인들과의 교류는커녕 얼마 전 동생이 당한 강간 때문에 성 하나를 절멸시켜 원수나 다를 바 없어진 그들이 생존을 위해 혹은 지금도 고생을 하며 기르고 있는 가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런 그들 앞에 17세의 요셉이 나타나 해맑게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 자신이 이 가문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라는 메타포로 가득한 꿈. 만약 이런 소리를 하는 요셉의 나이가 7세였다면, 형들은 이를 철없는 아이의 별다른 의도 없는 객쩍은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저런 소릴 하는 요셉은 17세입니다. 과연 아무런 의도가 없는 순수한 꿈 이야기였을까요? 하지만 제 관심은 창세기의 히어로 중 하나인 요셉의 악행에 대한 비난이 아닙니다. 그저 요셉의 신앙과 그를 도운 하나님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으로 기능하는 요셉의 형들을 포함한 수많은 구약 성서의 타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편애과 선택에 의해, 혹은 자신들보다 지혜로운 동생이나 더 사랑받는 어머니의 자녀로 태어난 누군가에 의해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얻은 땅, 재산, 장자권, 혹은 하나님이나 여호와를 알고 믿거나 죄를 뉘우칠 권리를 빼앗기거나 애초에 부여받지도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구약 성서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 타자화는 점점 심해집니다. 심지어 유대인이 얼마나 선하고 구원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미 주관적 가치판단이 끝난 ‘이방인’이라 불리지만 따지고 보면 선주민들일 뿐인 민족을 학살하고 그곳을 차지해도 된다는 정당성을 위해 다신교를 섬기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존재 자체가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정죄당합니다.


후에 등장할 대표적 이방인이자 소돔이나 여리고처럼 또 한 번 여호와의 권능에 의해 멸망당하도록 예정된 ‘니느웨성’ 사람들은,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거부하다 고래에게 삼켜졌을 정도로 불성실한 선지자 ‘요나’의 설교를 즉시 받아들여 회개합니다. 하지만 이 사례를 제외하면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여호와의 신앙을 전한 사례는 전무합니다.


무서운 것은 위와 같은 세계관과 윤리관이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 성서 전체에 기록되었고, 이 기록이 유대인들 사이에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절대 진리이자 규범으로 내재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그저 하나님과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차별로 더 많이 사랑받은 죄 밖에 없는, 창세기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주인공, 믿음과 성공의 롤모델, 프로타고니스트 요셉이 노예가 되어 이집트로 팔려 갑니다. 그들 뒤에 안타고니스트이자 동생을 판 악마 같은 인간이 된 형들이 배경의 음각처럼 아로새겨져 요셉의 무죄함과 곧 일어날 승리와 클라이맥스를 위해 봉사합니다. 이토록 유치하면서도 위험한 세계관이 영글어 가고 있습니다. 그 열매의 색은 분명 핏빛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