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8장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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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이야기를 중단시키며 갑자기 유다가 주인공이 됩니다. 유다와 이방인의 성교와 출산, 그렇게 태어난 차남과 형의 며느리 사이의 노골적 성행위 묘사, 이어지는 유다와 며느리의 근친상간 등 전반부에선 분명 금기시되고 다뤄지지 않던 내용이 빽빽한 밀도로 이어져 독자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이 문제의 장은 앞선 아브라함의 전쟁과 멜기세덱이 등장한 14장, 집요하게 반복되는 족보 부분과 함께 게르하르트 등 다수의 현대 신학자들에게 차후에 삽입되었다는 의심을 받는 장 중 하나입니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이 장의 어휘와 표현이 후세대에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지만, 우선 일반 독자라도 인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신과 인간의 관계에 치중하던 서술이 갑자기 추악한 일상과 죄악 속으로 깊게 들어간 고발적 프레임으로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야곱의 4남이며 레아의 아들인 적자 유다가 별다른 계기나 설명 없이 야곱과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 여자와 동침해 3명의 아들을 낳고 가정을 꾸립니다. 혼인했다는 언급은 장 끝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우선 불과 4장 전에서 여동생 다나가 이방인에게 같은 일을 당했을 때 벌어진 참상을 생각하면 대단히 의아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갈등이나 야곱 가문의 제재, 여호와의 꾸짖음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동기를 숨긴 채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하는 현대 문학의 주인공마냥 미스터리한 인물이 된 유다는 처음부터 가나안 이방인 사이에 눌러살 마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 아들을 낳을 때까지 '거십'이란 이방인 지역에 살았음이 명시되고, 장남 '엘'의 결혼을 주선하고, 그와 차남이 죽은 후 남은 며느리의 처리까지 챙기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이 여호와의 징벌로 죽었는데도 유다는 이방인 사회에서 활기차게 살아갑니다. 자기 양의 털 깎는 일을 가나안 사람에게 맡기는 등 생업을 이어가고, '친구'라 명시된 이방인과 지속적으로 만나며, 능숙한 솜씨로 이방인 창녀(로 오인한 자신의 며느리)와 화대를 흥정하고 며느리에게서 쌍둥이까지 낳는 그의 행동엔 일말의 주저함도 변명도 없습니다.
38장이 차후 삽입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제 개인적 근거 중 하나는 위의 서술 속 단순한 시간적 모순입니다. 아래의 타임라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44장에서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 앞에 등장한 형제 중엔 분명 유다가 있습니다. 그곳의 유다는 흔들림 없는 여호와 신앙과 야곱에 대한 효심으로, 베냐민을 지키려는 의도로 이집트 총리 앞에서 목숨을 건 변론을 하며 차라리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나서는, 인륜과 신앙과 형제에 대한 사랑 등 모든 도덕적인 면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이는 인물로 변했습니다.
요셉의 타임라인과 비교했을 때 38장의 유다의 일탈이 들어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큰 문제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린 나이는 최소 17세 이후, 이집트 총리가 된 나이는 30세이고 유다를 포함한 형제들을 다시 만난 시기는 요셉의 예언대로 7년의 풍년이 끝나고 흉년이 시작된 직후 라고 창세기에 명시됩니다. 그러니 유다가 38장의 일탈을 저지르고 창세기엔 기록되지 않은 계기로 갑자기 철이 들고 회개해 믿음과 효와 형제애의 화신이 되어 요셉 앞에 나설 시간적 여유는 노예 요셉이 총리가 되기까지의 13년에 7년의 풍년이 흉년으로 전환된 1년 남짓을 더한 21년 정도입니다.
그러나 38장 속 유다는 이방인 여자로부터 아들 셋이나 낳고, 장남과 차남의 혼인을 주관합니다. 게다가 차남이 여호와에게 살해당한 이유는 9절에 명시되었듯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사정)’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조혼이 일반화된 고대라 해도 현대의 이성적 독자는 남성의 사정이 2차성징 시작 후 약 1년 뒤에나 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현대 의학이 확인한 남성 청소년의 2차 성징 연령은 13세에서 15세입니다.
그러니 37장과 39장 사이에 난입한 38장의 서사가 모순 없이 성립하려면, 유다는 동생을 팔아치운 직후 이방인 여자와 결혼해 바로 장남을 낳고 그 장남은 13세에 결혼을 하고, 연년생으로 태어난 둘째도 13세에 2차 성징을 완료해 죽은 형의 아내와 성교하다 땅에 사정을 해 여호와에게 살해당하고, 유다는 아들 둘이 연달아 여호와의 저주로 죽은 직후 이방인 마을을 돌며 창녀를 찾다 며느리와 성교를 해 쌍둥이를 낳아야 합니다. 그리고 역시 1년의 틈도 없이 갑자기 갱생해 아버지와 형제에게 돌아가 식량을 얻으러 이집트에 가 여호와와 아버지와 형제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38장을 문자 그대로 믿거나, 창세기를 포함한 성서 전체에는 차후에 삽입된 부분 따위는 없다고 확신하는 유대교인, 기독교인들은 이 대목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나니’ 등의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정당화하는 걸까요?
저 희한한 일들이 모두 여호와의 권능으로 일어났다고 해도 문제는 남습니다.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한 이유는 유다가 “내 아들 셀라(3남)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유다의 2남과 3남은 연년생이 아님을, 둘 사이엔 적어도 1년 이상의 텀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타임라인 이미지엔 이를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해결할 문제는 또 있습니다. 뒤에 오는 창세기 46장 12절을 보면 총리 요셉의 힘으로 이집트 고센 땅으로 이주한 유다 가족 중엔 며느리 다말이 낳은 아들 베레스의 자녀가 있습니다.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그러니 38장의 사건이 모두 사실이 되려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갔다가 7년의 풍년 후 형제들을 다시 만나고 흉년 2년 차에 이집트로 이주하는 20년 남짓한 시간동안, 유다의 죄과가 모두 들어가기 위해선 1년의 틈도 없이 두 세대의 출산과 성장과 출산이 연달아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화와 종교적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이 이야기의 사실성을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이런 위작을 해석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악의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부분을 쓴 작가의 의도는 자기 방어를 할 수 없는 용의자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미결 사건의 혐의를 덮어씌우는 타락한 경찰을 닮았습니다.
제가 알기론 유대교와 기독교의 보수적 연구자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 시간적 촉박함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칭 사도인 바울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라는 류의 성구와, "이렇듯 성경은 유대인들의 심각하고 부끄러운 죄악까지 숨기지 않고 기록했으니 명백한 사실이자 진리다"라는 논리로 유다의 타락에 이은 변화만 옹호할 뿐입니다. 이성이 아닌 상식으로도 드러나는 모순이나, 조악한 교훈을 위해 결혼 직후 죽은 유다의 두 아들, 형사취수제라는 가부장 편의적인 구습 속에서도 생존할 수 없어 근친상간을 저지른 다말의 처지 따윈 그들의 눈엔 띄지도 않습니다. 성숙과 변화와 여호와의 지혜를 통해 대륙 차원의 인류를 구하는 요셉 이야기의 메세지가 중단되고 훼손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8장을 무리하게 삽입해 유다는 물론 여호와까지 ‘땅에 사정했다는 이유로 소년을 죽이는 관음증적 신’으로 격하시킨 저자도 저 억지스러움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창세기의 흐름과 맥락과 메시지의 통일성보단 어떻게든 이 억지스런 죄악의 리스트와 그에 따르는 저주의 이야기를 끼워 넣겠다는 악의로 가득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문자적 테러를 저지르고 또 그것이 수천년 간 전승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있지만, 이에 대한 제 생각을 푸는 것은 후로 미뤄야 합니다. 일단 이 장의 당대적, 표면적 효용을 정리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유다의 이방인과 얽힌 방종과 천륜을 어긴 타락을 저지른 이야기는 후세의 유대인들에게,
1. 창세기를 읽는 현재의 우리는 이미 이방인과 섞여 있지만 아무튼 이방인은 멀리 해야 하고 통혼은 물론 쾌락을 목적으로 한 성행위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비현실적 규범을 다시 강조하고,
2. 신명기에 이르러 율법에 명시되는 레비라트(형사취수제)라는 결혼제도의 정통성을 높여주며,
3. 유다와 이방인 사이에서 출생한 '베레스' 가문의 근본을 밝힘으로서, 비유대인들과의 통혼과 공존의 현실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모압과 암몬 민족을 롯과 딸의 근친상간으로 시작된 민족이라고 규정했듯) 이방인의 피가 섞인 동포들을 근본부터 비난하고 차별하는 모순적 대응을 할 수 있는 근거로
아주 잘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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