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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것을 긍정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부정하게 됩니다.

이 문장은 언젠가 책에서 읽었습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이 퍽 마음에 들었고 평소에도 틈만 나면 이런 저런 생각을(특히 형이상학적인) 자주 하곤 했기 때문에 여러 문제에 혼자 적용해보곤 했습니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제가 얼마나 잘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꽤 좋아해서 평소에도 현대 철학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읽고 알아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어떤 느낌인지는 금방 가닥이 잡혔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긍정할 때는 긍정받는 것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치를 인정받은 대상은 그의 삶에 편입될 수 있는 모종의 권리를 가집니다. 제 생각에 무언가가 긍정되거나 부정되기 위해서는 미리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 있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긍정할 때, 그것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어야 합니다. 길가의 돌을 누구도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인식이 있었다 한들 그것들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그대로 언제까지나 존재합니다. 어항 속 관상어나 대해의 청새치나 그들 입장에서는 형편이 같습니다. 어떤 정교한 동물이라도 자동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건 그저 어떤 현상의 연장이 아닙니까?


인간의 순수한 자아만큼은, 자유롭고 자율적이고 유동적이며 어떤 모습으로도 보여질 수 있는 무한한 다면성을 가집니다. 인간의 육체 자체로는 자동기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긍정되고 부정되는 것은 오직 자아의 존재 자체이며(그 밖의 어떤 것이 평가받더라도 대상이 되는 개념의 1차적 발원지에 있는 생산자 혹은 그것의 팬들은 자신의 자아가 부정되는 것으로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 모든게 키치입니다.


저는 이 키치라는 개념이 정말 좋습니다. 긍정과 부정 사이의 아주 근소한 차이가 내보이는 모호함을 적당히 잘 포착하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긍정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동시에 무언가를 부정하게 되는 식으로 관계되어 있다는 점을 당연하게 알면서도 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제한하고 싶은데, 어떤 누구라도 그 긍정 상황 아래 연관된 많은 개념들에 대한 판단과 선악과 스스로의 인식이 뒤바뀌고 개변되는 모습을 정확하게 보고싶어하지 않는다고 제가 생각하는 이상 그런건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 대개 사람들이 무언가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긍정과 다르게 믿음은 무언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 스스로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법칙입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대상의 전부를 믿어야 합니다. 최대한 미시적으로 분해해 분석하고 개선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부분의 가치를 평가하고 일부는 이렇게 판단하며 나머지는 이렇게 판단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무언가를 믿으며 살아갑니다.


자기 존재의 당위성, 현 체제의 정당성, 이것이 이것보다 나은 이유와 저것은 저것보다 나쁜 이유 등 이 모든것을 기호에 따라 믿습니다. 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이란 것은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보편적인 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이고 통일성을 띄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개념들은 한 시대 아래에서만 그 정당성을 스스로 빛내다 어느 순간 초신성처럼 소멸되었지만 하늘에는 금방 다른 별이 떠버려 사람은 어디선가 다시 등장한 빛나는 것으로 그저 시선을 돌렸습니다.


무거움이 부정적이고 가벼움이 긍정적이라면 무엇에 시선을 두어야 하나요? 사라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삶은 그로 인해 무게가 없고 무@용한 관계로 가볍게 되고, 가볍기에 아름답다면 그 가벼움의 찬란함 아래에서 초신성처럼 빛나다 그저 꺼져버리면 그만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의무와 책임은 무겁고 이 개념들은 존재를 짓누릅니다.


토마시는 의무는 다하지만 책임은 다하지 않습니다(보편적 사랑의 규칙 아래에서). 책에서는 4명의 인물이 각자 가벼움과 무거움을 시사하며 그것이 긍정되기를 원하기에 태도를 견지하고 절대적으로 긍정될 수 없다면 고통받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견지하는 태도 자체의 가치를 확언하며 그로 인한 고통을 느낍니다. 근데 이것은 키치 아닌가요?


테레자와 토마시가 마침내 해방될 때, 그들은 키치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것일겁니다. 토마시는 그가 많은 지면을 최대한 할애해서라도 정당화 하려고 했던 이성 문제를 포기하게 되었고, 테레자는 그녀가 지금까지 토마시의 강인함을 스스로의 유약함 정도의 위치로 끌어내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으로 영원할 것 같던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결국에 긍정하는 자는 그로 인해 부정되는 것 까지를 인정하고 긍정을 선언해야 합니다.


가벼움이란, 삶 자체로는 죽음 외에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것과 그로 인한 무@용성에서 비롯됩니다. 이 가벼운 삶은 존재와 실존을 결정짓기 위해 모든 인간에게 부과된 긍정과 부정의 연속된 수많은 선택으로 존재를 채워나가야만 하는 의무로 인간을 짓누르는 것입니다. 이 의무를 체감하기 때문에 인간은 카@레닌의 존재 방식이 부럽습니다.


어떤 형태로 실존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삶을 영원히 반복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선택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정해진 것은 긍정으로써 부정되는 것에 대한 외면을 죄악으로 여기는 태도 아래에서 내리는 확고한 결정만이 가치를 가짐을 아는 것입니다. 존재를 채워나가지 못한다면 이 가벼운 존재는 바람에 끊임없이 나부끼다 흩어지기 마련이니까 말입니다.





간만에 많이 좋은 감흥으로 읽은 책이었습니다. 시제를 꼬아놓고 작가가 서술에 개입하는 것도 거북하지 않고 좋았습니다.


이원론과 영원회귀의 해석이 좀 잘못되지 않았나 하고 느꼈지만 내용을 해치진 않아서 신경쓰지 않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근데 카@레닌이랑 무@용은 왜 금지어인가요??


암튼 참존가 재밌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