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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초반부에는 문장이 눈에 턱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페이지 넘기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진도가 안 나가더라고요.
제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처음 접한 탓도 있는 듯합니다. 그 분위기에 적응을 못했나봐요.
그런데 사건이 서서히 진전되고, 문체에도 점차 익숙해지면서(물론 리놀륨 바닥이 어쩌고, 크롬 구슬 장식이 어쩌고 하는 묘사에는 좀처럼 적응이 안 되었습니다) 속도가 났습니다.
필립 말로와 그 주변 인물들의 재미있는 대화나, 말로 자신의 독백을 읽는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로스앤젤레스의 칙칙한 분위기 묘사도 좋았고요. 예컨대 "어두워진 거리가 비 때문에 흐려진 어둠을 집어삼켰다" 같은 느낌의 묘사들이 자주 나오는데, 이런 문장들 덕분에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그곳에 살던 시민들이 도시를 어떤 느낌으로 이해했을지 추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은 어찌보면 싱겁게? 해결됩니다. 싱거운 걸 넘어서서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필립 말로가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추리했는지, 대체 이 사람을 죽인 진짜 범인은 누구인지 등은 제대로 해명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의문스럽네요.
소설 뒤쪽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 따르면, 레이먼드 챈들러 자신은 정작 그런 요소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빅 슬립>을 영화화하려던 헐리웃 관계자가 "그래서 이 사람은 누가 죽인 건가요?"라고 물었더니 챈들러는 "나도 모른다"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짐작건대 레이먼드에게 중요했던 건, 셜록 홈즈 시리즈 등에서 보이는 놀라운 합리성을 보여주는 추리과정이라기보다는, 테마나 인물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장르 소설이라기보다는 순수 소설에 좀 더 가까운 태도로 보입니다.
그의 소설이 끝없이 회자되는 이유도 아마도 이러한 이유에서겠죠.
오랜만에 읽은 만족스러운 소설입니다.
비리와 범죄, 타락의 온상인 대도시 속에서도 자기의 줏대를 지켜나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스스로 넌지시 말하는 것처럼, 그도 별 것 없는 속물입니다. 나쁜 일도 웬만큼 해봤을 테고, 꽤나 문란하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돈도 좋아하구요.
그가 지닌 도덕적 기준 역시 우리들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도덕적 기준을 당대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지키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범죄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경찰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돈만 받으면 거물 범죄자들의 뒷배를 봐주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말로의 그 소박한 가치관이 더욱 빛이 납니다. 그의 도덕성에 비견될 만한 사람은 ‘해리 존스’ 정도겠네요.
우중충한 로스앤젤레스의 밤거리, 죄와 악덕이 넘쳐나는 도시를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는 적극 추천합니다. 영화 속 대사를 보는 듯한 말로의 유려한 말솜씨는 덤입니다.
열린책들에서 출한된 기나긴 이별도 명작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책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감상문 잘쓰네 나도 빅슬립 읽었는데 난 이런글 못쓸듯 - dc App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