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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이란 존재는 양가적이다. 나는 내가 쓸 만한 모드를 제작해서 게임시스템이 바뀌게 됐다든지, 길가다가 쓰러진 사람을 발견해 구조조치 했다든지 하는 조그만한 업적이나 선행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바라지만 누구라도 잘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빌어 나는 드디어 세상에 알려본다) 누구든 내가 누군지 알지를 못하기를 바라지만 누구든 나를 잘 알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경우 양가적이란 말이 온당한 표현일까?


어릴 적 하던 숨바꼭질 놀이를 생각해본다면, 꼭꼭 숨어서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길 바라지만 그 이면에는 술래가 되어도 좋으니 나를 찾아줬으면 하는 욕망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인간은 양가적이란 말은 다소 어딘가 어색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줄다리기하는 여러 가지 욕망 속에 더 큰 진짜 욕망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꼭꼭 숨겨두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동전이 바닥을 구르며 어느 쪽으로 넘어질까를 고심하다 마음을 정한 뒤 기어코 쓰러져 버리듯, <생의 이면> 속 박부길 역시 숨김과 폭로의 두 가지 욕망의 양면을 동시에 가진 채 살아왔다. 그는 시종 말하기 부끄러운 듯,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하는 듯 적나라하게 인생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집필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양가적이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2

<생의 이면>의 박부길의 과거 기억들은 표층에 켜켜이 쌓이지만 의식적으로 그 표층들에 얼룩을 덧입히는 걸 잊지 않는다.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박부길은 외롭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세계가 선사하는 얼룩진 오욕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세계에 정붙이지 못하고 동떨어지길 선택한다. 박부길의 역사는 도피의 역사이자 숨김의 역사이다.


그는 부모란 오욕의 역사로부터, 저주받은 땅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희망하며 도망친다. 자신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곳에선 마음껏, 있는 힘껏 숨을 들여 마셔도 괜찮을 것만 같단 희망은 다시 한 번 세계의 폭력 앞에 산산이 부셔져버리고 만다. 그는 또 다시 세계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방법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세계와 다른 세계를 철저히 구별하고 세계의 모든 사람을 자신과는 다른 세계 속의 사람이라 단정 짓지만 그 역시 인간인지라 외로움을 떨쳐 버릴 순 없었다. 자신의 세계 속에 들어올 누군가를 간절히 바란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쥐새끼처럼 도망친 쥐구멍의 어둠에 익숙해진 박부길에도 한 줄기 빛이 드니, 그 빛은 김종단이란 여인이었다. 부길은 자신은 신실한 목회자와 결혼할 것이라는 종단의 선언에 자기 역시 목회자가 되리라고 종단에게 충동적으로 고백하고 연인이 된다.


하지만, 부길이 종단에게 끌린 과정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부길이 종단에게 끌린 것은 드디어 자기와 같은 세계의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부길이 종단에게 빠진 것은 찰나의 순간인데 후일 듣게 된 종단의 사정에서 사랑의 이유를 밝히는 진술은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부길의 내면에는 또 다른 사정이 있을 거다. 외로움을 떨치려는 욕망이 허상을 만들어내고, 그 허상에 부합할 수 있는 사람을 결정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에겐 오직 그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었을까?


부길은 사랑에 눈 뜬 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아니 스스로 운명이라 믿고 싶어 하는 것을 창조하곤 손에 꽉 움켜쥐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한 단계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종단을 향한 부길의 사랑은 자기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부길은 자신의 은밀한 목소리, 진짜 욕망인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련한 희망을 가린 채, 적정한 상호관계가 이루어질 관계를 넘어 종단을 향한 우상숭배를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종단에게 결부시키고 그는 맹목적으로 신비적인 종파의 일원이 되어 종단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는다. 그렇게 관계는 왜곡되고 굴절되어 버리며 결국 부길은 자신의 목소리마저 듣지 못하고 자신 자신으로부터마저도 도피하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종단이란 완벽함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그 세계 역시 위험한 세계로 변모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연인을 절대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거기에서 완벽함을 맛보길 원하는 부길은 절대적인 존재에게 모든 것을 바치면서 동시에 연인 역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하지만 신이 어찌 그리 호락호락 너그러울 수 있을까? 신은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기에 소홀하다. 완벽할 수 없는 것에 완벽을 바란 대가로 이성적으로 쌓아올린 논리는 충동적으로 산산이 조각난 파편으로 흩어지고 만다.


그는 종단에게 폭력을 저지른 후 되돌아올 수 없는 관계에서 모든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신학교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자신은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무너진 종단과의 사이 속 폐허에서 그는 재차 도피할 수밖에 없다.


3

그렇다면 다른 세계와 구별되는 부길의 세계는 대체 어떤 곳일까? 고향에서 도피한 곳, 어머니의 세계가 미치지 않는 곳, 종단이란 빛을 향해 희망이 보였지만 다시 닫혀버린 볕이 들지 않는 쥐구멍. 빛을 기대할 수 없는 습기로 축축한 어둠이 지배하는 그 쥐구멍. 어둠속에서 평온을 느끼고 어둠과 물아일체가 되는 부길의 최후의 세계인 그 공간뿐이다.


더 이상 도망갈 세계가 없다면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자신의 역사를 되짚고 그 역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내는 것.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것. 이 일련의 방법만이 유일한 생존의 방법이다.


그는 그 쥐구멍으로 되돌아와 자신이 직접 어둠이 되어, 괴로움과 외로움이 되어 소설을 집필한다.


아버지에 대한 괴로운 기억만이 가득한 고향에서 도망친 욕망의 기억, 괴로움을 피해 마주친 한 줄기 빛 종단에 대한 충동적인 욕망의 기억, 괴로움과 외로움의 반복에서 도피하려고 했던 과거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로소 그 세계에 발 붙이고 서 있을 수 있었다. 비로소 그 세계와 화해하고 앞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숨기려 든 인간이지만 그 모든 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살기 위해 그는 폭로한다. 모든 것을 폭로함으로써 그는 그렇게 박부길이 된다.


마침내 진정한 자신의 세계를,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은 그는 그렇게 박부길이 된다.


그렇다. 이게 바로 박부길이다.


우리 모두 박부길이다.


4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북이 안나와서 못읽다가 개정판 출간되면서 이북도 나와서 바로 삼.


간단하게 사견을 덧붙여보자면 숨김-폭로라는 모순 속 자신의 세계만을 구축한 박부길이란 인물에 연민과 함께 강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결국 인간이 넘어야 할 건 과거의 상처들이기에.


작품에도 언급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미언급)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등 많은 작품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헤세도 그렇지만 작가 약력에 신학교 출신인 점이 박부길이란 인물의 이력과 유사했다. 어느 정돈 자전적인 이야긴가? 궁금해졌다.


이야기도 재밌고 의미도 훌륭하지만 문체는 좀 어딘가 딱딱하단 생각이 들었다. 딱히 단점이라 생각하진 않고 내 머릿속에는 나름대로 지금은 장년인 한국 남자가 쓴 문체다라는 분류법이 있는데 딱 거기에 부합하는 문체였다. 근데 이런 글은 그 문체로 써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데 박완서 글을 떠올려보니 그냥 내가 국문학을 얼마 안 읽어봐서 가진 편견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 아무튼 난 괘안았음.


그리고 기본적으로 심오한 내용이지만 소설 속 박부길을 관찰하는 화자인 ‘나’가 탐정이 되어 박부길의 표층을 뚫고 심연을 알아내려 애쓰는 일종의 미스터리느낌이라 이야기가 친절한 편이다. 이야기가 친절하단 뜻은 박부길의 심리를 화자가 텍스트와 삶에 근거해 추측해서 직접 자신의 의견을 말해준다는 건데 이게 장점이자 단점인거 같기도 하다. 장점은 뇌를 덜 쓰고 읽어도 된다는 거고 단점도 뇌를 덜 쓰고 읽어도 된다는 거다. 장점은 작가가 직접 친히 내 생각을 한 번 확인시켜 오독확률을 준다는 거고(물론 그 자체가 정답은 아니겠지만) 단점은 나만의 방법으로 생각을 조립해나가는 오독할 재미가 좀 덜하다는 거다.


그리고 박부길이 군대 갔다 온 뒤, 텍스트로 봐도 그렇고 결말로 향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군대얘기가 생략되다시피 한 건 아쉽다. 무언가 박부길에게 인생의 전환이 되는 사건이 있었을 거 같기도 한데.. 에.. 이게 없다는 건 굉장히 아쉽거든요.. 물론 읽다보면 결국 박부길에게 구원의 길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만약 소설가가 된다고 가정했을 때 이 작품을 대표작으로 두고 있을 수만 있다면 인생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작품을 숨기지 않고 온 세상 동네사방팔방에 폭로하고 다닐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에리직톤의 초상>을 다음 번 구매목록에 반드시 포함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