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카프카를 좋아한다. 그의 소설에는 모든 것이 녹아 있다. 그의 소설은 마치 옛 신화나 전설처럼 온갖 환상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동화적 상상력과 옛 신화의 상징은 그의 소설 곳곳에 녹아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그와 동시에 지극히 근대적이다. 그의 소설에는 법이라는 실체화된 신과 벗어날 수 없는 근대의 권력에 대한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 녹아 있으며, 신화적 상상력과 환상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냉엄하고도 차가운 관료제의 톱니바퀴 아래 주인공은 언제나 짓밟힌다.


그러나 그는 또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대의 폭력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 서 있는 소수자들에게 주목했다. 그는 저항할 수 없는 자들의 저항을 주목했으며,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주목했다.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철저한 감옥인 근대의 판도라의 상자를 창조해낸 그는, 그 안에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그마한 희망을 남겨놓았다.


이처럼 그는 옛 악몽의 충실한 계승자인 동시에, 근대의 악몽의 창조자였으며, 동시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자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카프카는 오래 전부터 수 많은 사상가들이 좋아하는 작가이자 소재였다. 데리다는 카프카의 <법 앞에서> 라는 단편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을 응축한 글을 써내려 갔으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법 앞에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인 예외상태에 대해 설명해갔다. 카프카 얘기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발터 벤야민 역시도 <카프카와 현대>라는 책을 통해 카프카에 대해 설명했다. 당연히 온갖 작품에서 한소리 하는 좋아하는 지젝 역시도 카프카라면 환장을 했다. <삐딱하게 보기>부터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 까지 자기가 쓴 책에 카프카라는 단어가 안 나오는 책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슈퍼스타가 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수 많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 슈퍼스타인 푸코가 '번개가 일었다'라고 표현하고, 탈주, 코드화, 탈영토화, 리좀, -되기, 욕망 기계, 정동과 같은 수 많은 개념을 창조해냈으며, 지금도 사변적 실재론이니 신유물론이니 수 많은 자신의 사상의 사생아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 철학자. 바로 질 들뢰즈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들뢰즈는 역시나 카프카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이 글은 특히 그에게 의미가 있는데, 바로 <천 개의 고원>에서 나오는 리좀, 탈영토화, -되기 등의 개념이 이 책에서 자유롭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이 책이야말로 <천 개의 고원>으로 가는 다리 내지 관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가 카프카에 대해 다루고 있는 그 책이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라는 책이다.


2.


들뢰즈는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카프카가 쓴 모든 소설을 종횡무진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변신>,<유형지에서>,<굴>과 같은 유명한 단편 소설부터, <소송>,<실종자>,<성>과 같은 카프카의 장편 소설, 그리고 카프카가 쓴 편지와 엽편 소설까지 그야말로 카프카의 모든 소설을 끌어오며 카프카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다루던 수 많은 철학적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카프카의 단편 소설로부터 '-되기(devenir)'을 읽어내고,카프카의 장편 소설로부터 기계와 배치를 읽어낸다. <소송>의 재판으로부터 욕망의 내재성을 읽어내고, <실종자>를 통해 탈영토화를 읽어낸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카프카의 작품세계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탈주'이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수 많은 장치(혹은 기계, 관료제, 사회, 시스템, 권력 등등...) 들은 사람들을 자신의 방향으로 결정화하며, 사람들은 그러한 장치에 붙잡혀서 그들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그 장치는 '성'이고, '소송'이며, '형벌 기계'이고, '아메리카'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이끄는 장치는 자기도 모르는 곳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 사람들은 '성'에 가고자 하지만 '성'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며, '소송'에서 유죄를 피하려 하지만 왜 유죄를 받는지는 모르며, '형벌 기계'에 붙잡혀 자신의 죄명이 적히지만 그 죄명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아메리카'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카를 로스만은 착취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초월적인 법과 기계는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한다. '소송'은 무제한적으로 연기가 되어 너무나도 시간적으로 멀어서 K에게 닿을 수 없게 되었고, 자금성 안에 있는 황제의 칙령이 농부에게 닿는 것은 너무나도 공간적으로 멀게만 느껴진다. 바로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배치가 생겨난다. 편집증적 법은 다시 분열증적 법이 되고, 배치는 새롭게 바뀐다. 이 순간, 비로소 욕망은 다양화되고 생성되기 시작한다. 이것이야말로 들뢰즈가 보여주자 하는 카프카의 본 모습이다. 생성하는 욕망, 모든 욕망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잔혹한 기계들의 향연 속에서, 기계를 뒤흔들고 장치를 유예시키며 마침내 욕망을 생성해내는 그 흐름을 들뢰즈는 카프카를 통해 읽어내는 것이다.


3.


그러나 여기서부터 혼란이 발생한다. 편집증에서 분열증으로 나아가는 것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나오는 주제이며, 탈영토화와 리좀은 <천 개의 고원>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또한 카프카의 <굴>을 설명하면서 리좀을 거론하고, <유형지에서>를 설명하면서 '욕망하는 기계'를 언급하며, <소송>을 설명하면서 탈영토화를 주장하는 이 책은 과연 카프카를 평론하는 것이 맞는가? 이 책은 들뢰즈라는 렌즈로 보는 카프카라기보단 차라리 카프카라는 렌즈로 보는 들뢰즈에 가까워 보인다. 들뢰즈는 이 책에서 카프카의 언어부터 상징, 표현까지 모든 것을 샅샅이 분해하고, 해체하고, 해부한 뒤, 남들과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카프카를 재조립해서 자신만의 카프카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이것은 카프카인가? 아니면 카프카 라는 원료로 만든 들뢰즈의 새로운 창작물인걸까?


물론 들뢰즈는 이러한 비판을 예상이라도 한 듯, 글에 이미 이에 대한 반박을 준비해놓았다. 그는 작품의 텍스트와 그 의미에만 종속되어 있는 해석을 거부하고, 카프카가 쓴 소설의 "기능"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에게 있어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쓰기 기계를 가지고 실험하는 사람이며, 들뢰즈가 하는 일은 텍스트 그 자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이 어떠한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는지이다.


그러나 과연 이 것을 평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으로 카프카를 해석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카프카여야 한 건가? 카프카의 소설이 들뢰즈의 철학을 내포한 것일까 아니면 들뢰즈가 카프카를 자기 방식대로 해체하고 재조립한 걸까? 솔직히 말해 들뢰즈는 성경에서도 무신론을 읽어낼 수 있으며, 미제스나 하이에크의 저서에서도 공산주의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건 평론일까? 아니면 문학일까? 


지젝은 철학을 비역질이라 칭하며, 그가 하는 일은 철학자의 몸에다 알을 까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며,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진리가 해체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텍스트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걸까?


바로 이 곳에서 다시 카프카의 사유가 움직인다. 법으로 안내를 해주고 있다고 하지만 실은 법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문지기'처럼, 소송에서 꺼내주겠다고 말하지만 실은 무죄를 받을 수 있는 그 어떠한 방식도 제시하지 않고 있는 '화가'와 '변호사'처럼, 들뢰즈의 글은 카프카의 소설을 해석한다고 하지만 결코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고 있지 않고 있다. 결국 <만리장성의 축조 때>의 황제의 어명 처럼, 카프카의 글 역시도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누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으며, 결국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황제의 칙명이 아닌 황제의 관리들인 평론가들 뿐인 것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한다면, 카프카는 들뢰즈의 글로부터 탈주하고 있다. 들뢰즈가 치밀하게 배치해둔 자신의 평론으로부터 카프카는 새가 그물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듯이,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떠나간다. 들뢰즈가 카프카를 붙잡았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 카프카는 다시 유유히 자신을 포섭했다고 믿고 있는 평론을 조롱하며 새로운 영역으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이 끝없는 술래잡기의 가운데서, 독자들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더욱 더 풍성하고 자유로운 논의의 숲을 황홀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4.


평론은 붙잡고, 해석하고, 고정하는 글이다. 자기가 보는 관점을 명료하게 설명하며, 자기가 평가하고자 하는 객체의 속성과 본질을 탐험하고 정의내린다. 반면 문학은 탈주하고, 도망가고, 벗어나는 글이다. 우리가 너무 당연시하게 여긴 나머지 가지고 있는 인식의 맹점을 짚어주고, 때로는 충격을 주고 때로는 감정을 선동하며 우리가 한번도 가지 못한 영역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렇기에 문학과 평론은 영원히 술래잡기를 벌인다. 평론은 끊임없이 글을 재정의하고, 자신 안으로 포섭하려 하며, 정의하려 한다. 반면 문학은 끊임없이 단일한 설명을 거부하며, 새로운 측면으로 자신을 이끌어가려고 한다. 그리고 잘 쓴 문학일수록 이러한 술래잡기는 더욱 오래 지속되고, 또 풍부해진다.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술래잡기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는 무의미한 말장난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런 시각 역시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신념과 가치 체계를 모조리 찢어발기려 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문학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도 주해식 독서에 익숙해진 것 일수도 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고전', 혹은 '교과서'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며, 그 것이 담고 있는 어떤 신묘하고도 거룩한 지혜를 해독하는 훈련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해온 나머지 이 외에 다른 방식으로 책을 접하는 게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왜 성경에서 무신론을 읽어내면 안되는 것일까? 왜 논어에서 계급혁명을 읽어내면 안되는 것일까? 


플라톤 이래로 서양 철학을 지배해 온 초월성과 동일성이라는 공포스러운 독재자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한 들뢰즈에게 있어서, 텍스트, 그리고 저자가 무슨 의도로 이 글을 썼는지 자간 하나하나까지 분석하고 해체하여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극복하고 싶은 독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카프카의 글을 완결되고 닫힌 하나의 객체로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생성하는 흐름으로 다루었다. 그런 그가, 완결되지 않는 장편과 모호하고 상징적인 단편으로 가득 찬 카프카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완결되고 닫혀버린 원본과 그 원본에 대한 고정된 주해로서의 평론이 아닌, 미결인 채로 열려 있는 글과 그 글을 완결짓기 위해 끊임없이 의미를 생성해내는 텍스트-기계로서의 평론이라면 후자가 전자에 비해 덜 확실할지언정 더 풍성한 것은 사실이다. 언제나 정답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가끔은 서로가 서로를 잡으려 진행하는 풍성한 논의 한 가운데 뛰어들어 아이처럼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