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파네스는 분명히 희극의 신이지만, 여러모로 비판받을 점도 많은 작가다.



그렇기에 그의 희극에 열광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지랄도 풍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왜 이렇게 갈리는지 그의 희극을 비평하겠다.










"뤼시스트라테"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뤼시스트라테(군대를 해산하는 자라는 뜻)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 각국의 여성들을 불러 전쟁을 멈출 때까지 섹스 파업을 시행하게 하고,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해 대항한다. 결국 이에 각국의 남성들이 평화 조약을 맺는다는 것이 내용이다.


이렇듯 아리스토파네스는 섹스 파업이란 독창적인 소재와 당시로서 획기적인 주체적 여성을 창조했다.

또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산증인으로서 삶과 정치가 엮인 문제를 극에 올린다. 이는 즉 공동체의 문제로서 고발히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이 반복되가고 평화는 사라져가는 것을. 평화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무시한 것을.


주인공 뤼시스트라테를 앞세워 공동체의 같은 노력만이 사회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서술한다.



그러나 비판할 점도 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자신 성향의 정치인만을 편애하고, 그에 따라 편파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키몬이란 보수 성향 정치가가 4천명의 중모장보병을 이끌고 가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을 구했단 대목인데, 이건 지나친 과장이다.

이는 기존의 선동정치가를 비판했던 "기사"나 "벌" 등에서의 모습이 퇴색되며, 기존의 작품들의 메세지 또한 설득력을 잃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


줄거리론 테스모포리아 축제에서 여인들이 민회를 통해 여성혐오 작품을 쓴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 것을 알아챈 에우리피데스가 인척을 여장시켜 축제에 침입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게 하나, 결국 정체가 탄로난 인척을 비극의 패러디(안드로마케 등)로 구출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아리스토파네스는 극중 에우리피데스를 통해 당대에 만연한 여성 혐오 등의 이중잣대에 정면으로 맞선다. 이는 단순한 성별 갈등 조장이 아닌, 데메테르와 하데스의 화해로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돌아온 것 같이 아테네의 남성과 여성의 화합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디오뉘소스 축제 속 진행되는 데메테르 축제, 에우리피데스와 여인들과의 화해로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에우리피데스일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를 여성 혐오자로서 그를 비난하고 있으나, 그는 오히려 여성 혐오와는 먼 인물이었다.

이런 비판의 대표적인 원인은 그의 비극인 "메데이아"일 것이다.

"메데이아"의 자녀 살해가 대표적으로, 이는 확실히 비도덕적 행보다.

그러나 그 불행의 원인은 이아손의 비도덕적 행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에우리피데스는 인간 그대로를 그렸다.

에우리피데스의 극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한가, 악한가, 그것은 섣불리 말할 수 없다. 그처럼 메데이아의 행동은 도덕을 벗어나고 있으나, 그것은 이아손의 악행으로 시작되어 메데이아의 복수로 끝나는 가장 비극적인 인간극일 뿐이다.

또한 이아손의 여성혐오적 발언이 문제가 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이아손은 메데이아와 적대적 관계로, 그의 행보에 비판을 가할 대사다.


단순히 에우리피데스를 여성혐오자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파네스의 풍자는 정당치 못할 것이다.










"개구리"


줄거리를 얘기하자면, 국력이 황폐해진 아테네를 위해 주신 디오뉘소스는 저승에서 죽은 3대 비극 작가 중 에우리피데스를 데려와 조언을 듣기로 한다. 헤라클레스로 변장해 그의 노예인 크산티아스와 함께 저승으로 간다. 어찌저찌 저승에 도착하나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 중 누가 더 뛰어난지 논쟁을 붙이게 되고, 결국 아이스퀼로스를 선택해 지상으로 데려간다.


이렇듯 두 시인의 갈등은 세대 갈등이기도 하나, 아리스토파네스의 문학비평이기도 하다. 극은 기존의 영웅이 주인공이요, 탄원으로 신에게 구원받는 전형적 신화의 아이스퀼로스와 범속하고 비천한 인물이 주인공이며 신에 회의적이고 신화를 변형하는 에우리피데스를 대립시킨다. 아이스퀼로스는 공동체에게 유익한 것을 쓰고, 정당치 않은 것은 덮으며 관객에게 도움을 준다라 자신을 변호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은 인간다운 것을 쓰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생각케 한다라 변호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런 비극의 교훈에 관한 대립적 상황에 관객을 이끌어 고민하게 한다.


또한 알키비아데스에 관한 평으로 두 시인이 나뉘는데, 우선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비애국적 행위와 이기주의를 질타하나, 아이스퀼로스는 그의 능력을 인정해 도시에 사용하라고 한다. 이는 희극으로서 정치에 밀접한 훌륭한 논의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있다.



에우리피데스에게만 불합리하단 것이다.

작품에서의 대립 구조는 저승에서 비극의 왕자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스퀼로스와 왕좌를 쟁탈하려는 에우리피데스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작품은 에우리피데스를 비방한다.

작중에서 헤라클레스는 에우리피데스를 평가절하하며, 저승에선 에우리피데스의 추종자에게만 '교활한'이란 평이 붙고, 아이스퀼로스의 극은 고상하다고 한다. 아이스퀼로스의 극은 그가 죽었으나 살아있는 반면, 에우리피데스의 극은 그가 죽으면서 같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울에서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보다 더 무겁기에, 디오뉘소스는 아이스퀼로스를 데려간다.

즉, 아리스토파네스가 뜻하는 비극이란 도덕적, 교훈적 목적을 가지고서 대중을 교화할 의무가 있단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위해 에우리피데스를 비방하도록 관객들을 유도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여인들의 민회"


줄거리를 얘기하자면, 블레퓌노스의 아내인 프락사고라는 여인들을 불러 남장을 시켜 의회에 가 국정을 여성들에게 넘기고자 한다. 이에 여인들은 남편의 옷들을 훔쳐 미리 의회를 장악한다. 그리고 법안을 내놓는데, 그 내용으론 재산 및 처자 공유화, 누구와도 교접할 수 있으나, 먼저 젊은 남녀는 늙은 남녀와 해야한다는 것이다. 작품은 노파와 교접하게 되는 청년 에피게네스의 비(悲)와 젊은 여인들을 낀 노인 블레퓌노스의 희(喜)를 교차시키며 끝이 난다.


이렇듯 아리스토파네스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동조하며 최초의 사회적 유토피아를 제시한다. 공유 재산과 여성지배로 그것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 가족 제도와 매춘의 폐지를, 즉 사유재산의 폐지를 선언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는 문제를 제시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유토피아를 비판하며 그것은 디스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라 조소한다. 이는 에피게네스의 예로 드러난다. 프락사고라는 공동체의 공유화를 주장하며 다수가 이에 찬성한다. 그러나 이에 에피게네스란 청년이 받는 대가가 정당한가? 공동체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괜찮은가? 그리고 또한 이 사회는 처자 공유제로, 에피게네스의 연인이 말했듯, 누가 부모인지도 모르는 오이디푸스가 거리에 가득하지 않겠던가? 이런 의문을 자아낼 것이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파네스는 유토피아의 존재를 조소한다.


또한 프락사고라는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노예 노동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중잣대이긴 하나,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부(富)의 신"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아폴론 신전의 신탁에 따라 가난한 크레뮐로스는 그의 하인 카리온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부의 신이나 제우스에 의해 눈이 멀어 마구잡이로 부를 나누게 된 플루토스를 인도한다. 그러나 가난의 신이 나타나 부자가 된 크레뮐로스에 반발해 서로 가난과 부, 무엇이 덕인지 논쟁한다. 결국 논쟁에서 이긴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를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데려가 눈을 띄게 한다. 이에 크레뮐로스는 부자가 되고 그의 집으로 가난했으나 부자가 된 선한 남자, 알거지가 된 밀고자, 젊은 애인을 잃게 된 노파, 경기의 신으로의 취업을 제안하는 헤르메스가 찾아온다. 크레뮐로스는 부의 신을 보물창고에 모시자 제안하고 사람들은 축제를 연다.


이렇듯 아리스토파네스는 부에 다룬다. 이에 대해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다뤄야만 한다. 아테네는 민주국가로 민주주의에 대해 자부심이 강했으나, 민주주의는 전쟁과 패배를 막지 못했다. 이에 개인주의가 극심해져, 민주주의는 그저 재판관 급료와 의회 참여 급료를 주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빈부격차 또한 심해졌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파네스는 묻는 것이다. 이게 옳은 것인가? 욥처럼 정당한 사람은 수모를 겪고 악한 이들은 번영을 누리는 것이? 극에선 플로투스가 눈이 멀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외친다. 또한 이는 크레뮐로스가 눈을 치료함으로서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는 그 부의 본질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이는 가난(페니아)과 크레뮐로스의 논쟁으로 드러난다.


크레뮐로스는 주장한다. 만약 덕에 따라 돈이 있다면, 모든 이들이 올바름을 위해 노력하지 않겠는가? 선인에겐 행복을 악인에겐 불행을 바라는 것이 어찌 이상한 것인가?

그러자 가난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누가 일을 하겠는가? 크레뮐로스는 노예가 하면 된다고 하지만, 모두가 부자라면 누가 노예를 팔겠는가? 가난이 있기에 부가 있고, 부가 있기에 가난이 있는 법이며, 가난이 있기에 예술이, 기술 등의 노동이 있다고.


작중에서 크레뮐로스는 가난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한다. 다만 희극적으로 헤카테 여신을 끌어들여 이긴 것뿐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돈을 절대자로 묘사하나, 동시에 이 논쟁을 그린다. 그는 부를 조소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부를 다루는 것이 아닌, 부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우습게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파네스 전작을 비평해보았다. 그의 희극은 헤겔이 말했듯, 밝고 명랑하나, 아리스토파네스 자신은 진지하다. 그 진지함을 가벼운 웃음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참으로 희극적이다. 그 부분을 이 비평이 드러냈길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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