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뒷골목에서
- 보석상을 하고 있는 비너스를 잠시 만났드러니」


  도대체 몇 억만년이나 더 지내야만
  비너스여 그대는 좀 철이 들 것인고?
  팔라스 아테나 같은 전쟁의 여신도
  이젠 마음을 고쳐 반전주의 편도 되고 있는 판국에
  비너스 그네만은 아직도 여전히
  스물 두어살짜리의 미인 놀음만 그칠 줄을 모르고
  요새는 아테네의 힐튼호텔 뒷골목 같은 데서
  보석상을 하면서, 또 신랑감을 물색하노라고
  여념이 없이 기울어져만 있더군.
  즈이 손녀 파이드라가
  의붓아들한테 생피낼 사랑을 하다 살1자하고 만 것도
  벌써 다 깡그리 잊어버렸는지
  찾아오는 손님들한테 부지런히는 추파만 던지고 있더군.

  내가 그네 속을 좀 떠볼 양으로
  혼사용(婚事用) 반지를 하나 보이랬더니,
  내 주머닛속 실력까지 다 눈치채고
  뛰는 물고기를 단 은반지로다가 꺼내왔는데,
  내 가운데 손가락에 끼어 주었다가는 쑤욱 빼어
  제 가운데 손가락에 갖다 끼어보이며
  오존 향내 싸아한 너털웃음만 터트리고 있는게
  바다의 파도가 수수억만년(數數億萬年)
  혈육을 만들어 낳아놓은 여자라는 건
  달리 고쳐놓을 생각일랑은
  아예 꿈에도 내지 말아야겠더군.


-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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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에는 서정주 자신이 설계한 알레고리 때문에 묘하게 느껴지는 시들이 많이 있지만, 시집의 주조로부터 약간 이질적이어서 눈길을 끄는 작품으로 「여자의 손톱의 분홍 속에서는」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은 바로 앞에 붙은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과 짝을 이룬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 님'에 비해 '여자'는 보다 객관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고 또는 플라토닉한 사랑과 섹슈얼한 사랑의 비교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시가 이질적인 것은 다소 난데없게까지 느껴지는 소재 때문이다. 이 시에는 트로이 전쟁의 사실상의 장본인으로서의 '비너스'가 나온다. 여기에서 그는 말하자면 분별없는 사랑에 대한 상징으로서 다뤄지고 있다. '손톱의 분홍' 속에는 '우리 님'에 대한 아름다운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런 '비너스의 피'도 심어들어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뒷날의 『서으로 가는 달처럼…』에서 이 비너스에 대한 언급이 다시 나온다는 점이다. 가령 앞서 살펴본 「나이아가라 폭포 옆에서」라는 시에서 그의 시어 중 하나인 피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해보는 것과 유사하다. 서정주는 세계 여행에서 비너스의 화신을 두 번 목격하는데 하나는 케냐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에서이다. 그런데 그 반응이 완전히 상반되어 있다. 케냐의 보석상이 된 비너스에게서 '사랑의 뚜쟁이 노릇'을 작파하고 '제 사랑만의 포로'가 된 모습을 보며 기특해하는 데 반해(「호박(琥珀)을 파는 암보쎌리의 검어진 비너스」), 위의 시와 같이 그리스의 보석상이 된 비너스는 트로이의 신화에서와 다를 바 없는 푼수처럼 평가하고 있다. 이 두 시에서 비너스의 화신이 모두 보석상으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동천』에서 '반지'가 중요한 시어로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나 그 이상의 무언가는 잘 잡히지 않아 유감이다. 몇 번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덧: 게시물이 올리자마자 바로 삭제가 됐는데 아마도 1연 11행 때문인 것 같아서 불가피하게 고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