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6장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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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가문의 이주가 시작됩니다. 디아스포라의 원형. 하지만 그리스어 '디아스포라'가 성서에 최초로 나오는 부분은 신명기이고 이주 서사는 이후에 더 무수히 나올 테니, 그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겠습니다.
야곱 가족은 예루살렘에서 30km 남쪽에 위치한 '헤브론'에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집트로 남향하는 길의 중간엔 '브엘세바(약속의 우물)'가 있습니다. 브엘세바는 과거 아브라함과 이삭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우물 소유권을 인정받는 협정을 맺은 곳입니다. 그 중 두 번째 협정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26장에서 이삭이 브엘세바에 온 이유도 '흉년'이었습니다. 그때 여호와는 '애굽으로 가지 말'고 이미 블레셋 민족이 선주하던 브엘세바 인근 '그랄'에 정착할 것을 명령합니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는 약속과 함께.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여호와의 발언으로 이삭의 원래 행선지는 이집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약속을 믿고 그랄에 정착한 이삭에게 일어난 일은 약속의 실현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처럼 아내를 뺏길까 두려워 같은 '누이' 계책을 반복하고, 아버지가 팠고 아비멜렉이 협정으로 소유권을 인정해준 우물을 또 빼앗기고 추방 당해 브엘세바까지 쫓겨납니다. 그후 다시 나타나 우물 협정을 제안하는 아비멜렉의 행동은 현대 독자의 눈엔 기만적 우롱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하지만 말을 바꾸는 것은 아비멜렉만이 아닙니다. 이삭에겐 이집트가 아닌 그랄에서의 정착과 풍요를 약속한 여호와가, 아들 야곱에겐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며 다시 이집트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말 바꾸기에, 번거롭기 짝이 없는 섭리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대목에선 이집트에 대한 유대인들의 뿌리깊은 선망과, 여호와의 미실현된 약속을 강박적으로 반복해 기록하면서도 그 진실성은 의심하지 않는 모순적 사고 즉, 온갖 강대국이 가나안에 정착해 융성하는 동안 이렇다할 세력을 만들지 못하고 방황했던 자신들의 초라한 역사를 모두 신의 계획에 따른 이유와 '의미'가 있는 행적으로 바꾸려는 열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야곱의 이야기로 돌아와 봅니다. 야곱 이하 총 4세대를 포함한 무리의 규모는 '70명'이라 명시됩니다. 유다가 며느리에게서 얻은 늦둥이 아들의 두 자녀까지 포함해야 맞아 떨어지는 숫자입니다.
46장의 마지막 절에 대해서도 꼭 이야기하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분량도 전체 50장 중 13장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당대 최고의 국가인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과 그의 초청으로 성사된 영광스러운 이주' 라는 멋진 클라이막스.
그런데, 46장 끝에서 요셉은 파라오를 만나게 될 가족들에게 다음처럼 조언합니다.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파라오가 직접 한 약속, 즉 요셉의 가족에게 '좋은 땅을 주'고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이'겠다던 것과도 배치되는 설명입니다.
황당하고 갑작스런 반전이지만, 한국의 독자는 저 설명을 이해하기에 유리합니다. 고려 시대부터 거란과 여진 등 북방 유목민을 국가에 편입시키며 그들에게 백정 직책을 주어 분리 통치하고 차별해온 역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 기묘한 서술은 제가 보기엔 38장에 유다의 악행을 막무가내로 끼워넣는 어설픔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 한 절의 첨언은 신의 섭리와 성취라는 결과론적 의미부여에, 창세기를 본격적으로 집필하던 기원전 6세기엔 명확히 알기 어려웠을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후대의 해석을 위한 힌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속 위와 비슷한 서술의 사례를 여기서 이야기해두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창세기 41장 45절의 요셉의 아내가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의 핵심 도시 온(헬리오폴리스)의 최상층 귀족이던 제사장의 딸이었다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제 구체적 생각들은 출애굽기에 대한 글에 차차 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절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싶었는데 설명 감사합니다 재회의 순간에 족보가 언급되는 게 좀 문학?적인 면이 있디고 생각되더라고요
목회자나 연구자들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한때 신자로서 성경을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읽을수록 튀는 부분이 참 많네요. 지독한 민족주의자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종교 지도자의 비중이 가장 크지만, 끝없이 의심하는 저자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에도 님만큼 성경을 읽으신 목회자 분이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뭘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지적 설계나 어린 지구론 같은 거 뿐이었어서. 물론 그땐 저도 좀 쓸데없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긴 했지만. 아무튼 텍스트 뒤편의 사람을 그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그 시도는 항상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성경은 더더욱.
이집트에 가서 살고싶다고 바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야곱대에 이집트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먼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아비멜렉을 훨씬 추월하는 당대의 패자였는데 갑자기 가서 받아 달라고 하는 것은 어려웠을 듯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왜 가나안 땅을 빨리 차지하지 않는 지에 대한 이유가 나오는데, 아직 그 땅 민족의 죄가 다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일단 야곱의 일족은 70명 뿐이니 일단 번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대의 강대국인 이집트 안에서 자리잡을 기회를 얻고 힘을 기르는 것은 아비멜렉같은 자들과 어깨를 맞대고 사는 것 보다 나아보이고 실제로 크게 번성했다고 나옵니다.
고센 땅에 대해선, 양을 치는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선 그 땅이 가장 좋고 기름진 땅이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를 보아도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부였음을 보면 이는 예로부터 꽤 뿌리 깊은 갈등에 기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과론적인 해석입니다. 세상 만물을 담을 수는 있는 헐거운 그물이죠. 좀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 죄송하지만, 그런 식의 해석이면 나치도 UN 창설과 세계 평화와 이스라엘 건국에 기여했으니 다 옳은 일이고 의미가 있었다는 결론도 가능해집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이런 식의 해석으론 나치가 발생하고 힘을 얻었던진짜 원인도, 그 원인을 찾아 예방하는 해결책을 찾는 일 등도 불가능해집니다. 사실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다음 글과 그 이후를 통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세상 만물을 담을 수 있다면 제 의견도 쉬이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원인과 과정이 나름의 타당성을 갖추고 있음을 말했을 뿐입니다. 어떤 반동에 의한 이로움을 얘기한 적도 없고,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라는 겁니다. 말씀하신 반박은 결과론에 대해 논하고 있긴 하지만 일단 직접적인 반박으론 보이지 않습니다. 여하튼 하실 말씀이 많다고 하시니 저도 다음 글을 기다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