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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초보 피해망상증 환자야, 로저." 처음으로 프렌티스가 그의 성 대신 이름을 부른 것, 이에 로저는 그의 장광설을 멈출 정도로 감동을 받는다. "물론 잘 발달된 그들이라는 체계가 필요하지 ─ 그러나 그건 단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해. 그들이라는 것 하나 하나에 대응되는 우리라는 것도 하나씩 있어야 해. 우리 경우엔 그게 있어. 창의적인 피해망상이라면 최소한 그들이라는 체계만큼은 완벽한 우리라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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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필요도 없이 '망상들'이란 언제나 공식적으로 정의되지. 우린 실제와 허구의 문제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들은 편리한 대로 얘기할 뿐이지. 중요한 건 체계야. 어떻게 자료들이 그 안에서 정렬되는지. 어떤 것은 논리가 정연하고 다른 것들은 무너져버리지. 포인츠맨이 글로밍을 보냈을 거란 네 생각은 잘못된 갈림길로 빠진 거야. 상반된 망상의 집합이 없었다면 ─ 내가 우리라는 체계라 부르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들이 없었다면 ─ 글로밍에 대한 그런 생각도 괜찮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 ─"

"우리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라고?"
"실제의 것이 아니라."
"하지만 공식적으로 정의되는 것."

"편리함을 위해서지, 그래."
"글쎄, 그럼 넌 그들의 게임에 참여하는 거잖아."

"그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꽤나 제대로 된 작전을 펼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우리가 아직 이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아."





물론 핀천답게 곧이어 대항세력의 담론을 비틀고 희화화하는데 주저없음


가령 로켓(도구적 합리성)에 대항하는 중력(태곳적 힘)을 자처하는 여인을 조명하면서도, 그녀가 싸구려 강신술과 삼류 미디어에 매혹되는 동시에 희롱당하며, 폴터가이스트(초자연적 반-중력)에게 농락당하는 에피소드를 써내려가는 식


동시에, 그리고 역시나 핀천답게 슬로스롭의 '분해'(V.에서 이미 선보인 적 있는)라는 묘수를 던지며 판 자체를 뒤틀어버림




체계에 대한 대항/저항은 필연적으로 체계 내부의 논리에 갇힌 채 체계의 되먹임에 기여할 것이고, 때로는 혼란과 희화화 속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인식


출구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항/저항은 산발적이고 때론 지리멸렬한 광대노름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면서도, 대항/저항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솟아오를거라는 전망




묘하게도, 얼마 전에 읽었던 책들이 떠오르며 공명한다는 인상을 받음


"우리는 안에서부터 무언가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어요. 처음에는 바깥에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다가, 나중에는 안에 있으면 변화시킬 실제 가능성이 더욱 크리라고 믿지요. 적어도 안에 있으면 더 자유롭게 행동하게 된다고 여기지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외부에서나 내부에서나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그러나 이게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역사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그게 우리의 슬픈 멕시코 역사건 불행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건, 내가 보기에는 어떤 차이점도 없어요. 여기에서 바로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생기는 거지요. 우리는 내부에서부터 실수를 저지르지만, 그 실수들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아요. 실수가 더는 실수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실수들, 그러니까 달걀로 바위를 깨려는 시도는 정치적 장점이자 정치적 전략이 되지요. 그리고 실수를 범한 사람에게는 정치적 존재를 부각시키고 언론의 조명을 받는 요인이 되지요." ─ 로베르토 볼라뇨, 2666



"지옥의 범람이고, 역사의 넘침이다. 따라서 그것은 악마이다. 아니다, 나는 악마를 기다리지 않았다. 악마가 오자, 이 책은 불에 타버린 것처럼 끝이 난다. 나는 이 책이 돌이킬 수 없이 악의 책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역사의 책, 악의 책 말이다. 그 악은 소리의 악이고, 지옥으로부터 찌렁찌렁하게 들리는 소리의 악이다. 그것은 굶주림, 질병, 고통의 악이다. 그것은 동물의 탈을 썼지만, 지금은 옷을 벗어 버린 나체 인간의 모습을 한 악이다. 그저 단순히 말해서 심술 사나운 악이다.

그는 마침내 나로부터 분리된다. 그렇게 5월의 어느 날 아침, 베네치아에서 그 끔찍한 곤충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면서 문을 통해 나의 방으로부터 천천히 나갔다.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고요하고, 차분하게, 불안 없이. 먼 바다." ─ 미셸 세르, 기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