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본문은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의 요점을 간추려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가 본서에서 제안하는 도식을 '사고의 세 시스템'이라는 형태로 정리함으로써 달성된다. 물론 완전 객관적인 요약은 존재할 수 없고, 결국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에 불과하지만, 각자의 해석이 대치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로서의 독해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사고의 세 가지 시스템과 '상징질서'
아즈마는 본서에서 3가지 사고의 시스템을 검토하고 있다. 그것은 차례로 형이상학 시스템, 부정신학 시스템, 우편-오배 시스템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세계가 언어에 의해 분절되고 구조화되어있음을 인식하는데서 시작하여야 한다. 인간은 언어에 의한 분절과 의미 부여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 인간 없이도 무언가는 존재하겠지만, 그것들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은 언어라는 망을 통해서이다.
세 시스템의 차이를 이 '(언어적)세계=상징질서'의 구조를 인식하는 차이로 정리할 때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형이상학 시스템, '비세계적인 것'은 없다
첫 번째로 형이상학 시스템을 살펴보자. 이 시스템은 '세계=상징질서'의 완결성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세계=상징질서'에는 외부가 없다. 거기선 "언어 내 번역"이 항상 가능하며, '시니피앙(기호 표현)'은 반드시 '시니피에(기호 내용)'을 가진다. 이는 "모든 시니피앙이 또 다른 시니피앙에게, 즉 모든 시니피앙이 대응하는 시니피에에게 송부 가능"한 시스템이다.
구체적인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후설의 현상학, 러셀의 고유명에 관한 기술주의, 그리고 프로이트의 후계자 중 정통파로 여겨지는 자아심리학이다. 요점은 이들은 전부 세계는 완결되어있고, 그 외부가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거기선 상징질서가 완결되어 있고, 모든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를 갖는다. 모든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를 가질 때, 모든 시니피앙은 지시의 연쇄를 통해, 시니피에에 의해 특정되는 어떤 현전 가능한 존재자를 지시하게 된다. 이 세계에선 현전하는 세계에 대해 유의미한 언어의 잉여는 없다. 모든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를 가질 때, 세계의 외부는 없다.
반대로 말하면, '시니피에가 없는 시니피앙'에는 우리 앞에 '현전하는 세계'의 외부가 깃든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신학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형이상학 시스템에 대해 순서대로 확인해 보자. 아즈마의 정리에 의하면,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목소리의 지평(세계)에 의해 회수되지 않는 것, 즉 비세계적 존재는 인정할 수 없다." 이리하여 세계는 완결되고, '타자'는 소멸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의 '전제'가 귀결된다.
어째서 비세계적 존재 (현전하지 않는 것)가 없음으로 인해 주체의 전제가 귀결되는 것일까. 초월론적 현상학에 있어서는 경험적 타자가 아닌, 오히려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 전부를, 주체가 적어도 의미적으로는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타자는 주체의 의미적인 양해를 통해 여과되는 방식으로밖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의 '거울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주체=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건, 세계에 회수되지 않는 비세계적 존재자뿐인 것이다.
이리하여 결론적으로 말하면, 외부를 인정하지 않고 세계를 완결시키는 후설적 '목소리'는, '의식의 동일성 혹은 시스템의 중심성을 강화하는' 것이 된다.
다음으로 기술주의에 대해서, 고유명에 관한 기술주의에서는 고유명이라는 시니피앙은 확정기술의 집합이라는 시니피에로 환원 가능하며, 그에 의해 정의된다.
고유명, 예컨대 본서에서 예로 들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에 부여될 수 있는 술어/제성질, 즉 '플라톤의 제자', '<자연학>의 저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라는 확정기술의 다발이며, 그에 의해 정의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고유명의 '언어 내 번역'이 항상 보증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고유명이라는 시니피앙은, 그것에 대응하는 확정기술의 다발이라는 시니피앙을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환원가능하다. 확정기술이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주체의 여러 속성이므로, 고유명을 확정기술로 환원하는 것은 주체 속에 현전에 위배되는 무언가,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 즉 '내 안에 있는, 나 이상의 무엇'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은 자아심리학이다. 거기서는 모든 욕동(시니피앙)이 그 목적(시니피에)을 가진다. '욕동'은 전부 어떤 세계 내적인 존재자를 겨냥한다.
양자를 연결시키는 것이 '쾌락원칙'이며, 그것은 초월론적 시니피에라 불린다. 초월론적 시니피에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규정하고 그것을 확실하게 하는 법칙, '언어 내 번역'을 확실케하는 법칙이다.
이에 대응해 모든 시니피앙을 그에 대응하는 시니피에로 되돌려보내는 형이상학 시스템은, 초월론적 시니피에 체제라고도 불리운다.
4. 부정신학 시스템, '비세계적인 것'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라캉이 대표자로 꼽히는 부정신학 시스템이란 부엇인가. 거기선 '세계=상징질서'의 완결성이 붕괴된다. 세계에는 외부가 있다.
"부정신학이란, 긍정적=실증적인 언어표현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뒤집으면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서만 파악가능한 어떤 존재가 있는, 적어도 그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세계인식에 불가결한 신비적 사고 일반을 넓게 가리키고 있다."
부정신학 시스템과 우편-오배 시스템에 공통되는 세계의 완결성의 해체, 즉 외부의 출현을 아즈마는 논리적 탈구축이라 보르며, 그 부정신학 버전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논리적 탈구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초월론적 사고의 한 타입이다. (...) 논리적 탈구축의 방법은 두 가지 스텝에 의해 성립한다. 첫째로 그런 사고는 임의의 경험론적 텍스트/시스템에서 그 자신의 논리로는 제어=결정불가능한 특이점을 적어도 하나 발견한다(형식화의 한계). 둘째로 사고는 그 특이점을 통해 텍스트/시스템 이전의 차이공간 또는 '사고되지 않은 것'으로 소행한다(한계의 존재론화). 그리고 그런 소행의 정당성은 많은 경우 시적 언어의 힘에 의한 신뢰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런데 부정신학 시스템, 존재론적 탈구축, 초월론적 시니피앙 체제 등등으로 불리는 이 사고, 하이데거, 라캉, 지젝 등이 그 대표로 꼽히는 이 사고는 대체 어떤 것일까.
4-1.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
이 논리의 기초는 하이데거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여겨진다. 제 1스텝으로서 논리적 탈구축을 행하면, 곧바로 시스템의 특이점, 외부로 향하는 길을 발견한다. 그것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현존재', 즉 인간이다. 현존재는 세계 내부의 한 존재자인 동시에 세계가 그곳에 나타나는, 세계를 구성하는 주관이기도 하다.
즉 현존재란, 하이데거스럽지 않은 말로 표현하면 세계의 내부이자, 동시에 세계의 외부이기도 하다. 이 성질에 대해 아즈마는, 하이데거로부터는 '이중주름', 푸코로부터는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라는 단어를 빌려 표현하고 있다. 인용을 보자.
"<존재와 시간>은, 현존재가 구조적으로 떠안는 이중성, 하이데거가 '이중주름'이란 은유로 부르는 조건에 주목했다. 인간은 분명 세계 전체를 산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일상적 경험이 알려주듯 세계 속에서 하나의 사물이기도 하다. 즉 현존재는 하나의 존재자로서 세계에 내속됨과 동시에, 세계 자체도 산출하고 있다. 이 규정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자면, 현존재가 오브젝트 레벨(존재되고 있는 사물들)과 메타 레벨(그것들은 존재시키는 근거)에서 동시에 위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p.141 <상상계와 동물적 회로>, <아즈마 히로키 논집>)"
4-2. 초월론적 시니피앙
자, 이렇게 해서 '세계=시스템'에 구멍이 열렸다. 세계의 외부가, '불가능한 것'(=현전하지 않는 것/경험 불가능한 것)이 단 하나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를 현전하게 하는 것,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 그 자체이다. 표상하는 주체를 표상할 수는 없다. 그것이 '세계=주체'의 구멍이다.
그러나 아즈마에 의하면 부정신학 시스템은 그 구멍을 봉합하여 시스템을 다시 안정시킨다. 그것이 초월론적 시니피앙의 기능이다.
그것은 세계의 외부, 라캉식으로 말하면 '현실계', 혹은 '불가능한 것' 그 자체에 주어지는 이름이다. 거기에 이름이 주어짐으로써 부정적인 외부가 지명되고, 내재화된다. 그것은 외부 그 자체를 지시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대응하는 시니피에는 없다. 그것은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 이며, 라캉에 의해 '대상a' 혹은 결여 그 자체의 시니피앙, 즉 '팔루스'라고 불리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는 '대상a' 혹은 '팔루스', 즉 현실계가 나타나는 역설적 시니피앙으로 해석된다. '대상a'는 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계 정중앙의 비어있는 결여(괴델적 결정불가능성)의 '실제화', 이를테면 주체의 구멍을 메우는 것을 의미한다."
4-3. 형이상학 시스템과의 차이
형이상학 시스템과의 차이는 분명할 것이다. 부정신학 시스템에는 세계의 외부가 있고, 그것을 지시하는 시니피앙, 즉 시니피에가 없는 시니피앙이 존재한다.
형이상학 시스템과 비교해보자.
첫째, 부정신학 시스템은 고유명에 대한 반기술주의를 정당화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확정기술, 나 자신을 설명하는 말들로 환원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에 (실제로 있는) 나 이상의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느낀다. 예컨대, '나 야마다 타로는, 남성이 아니어도, 일본인이 아니어도, OO회사의 사원이 아니여도, 야마다 타로다.' 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만약에 고유명이 확정기술로 환원가능하다고 한다면, 즉 그것에 의해 정의가능하다고 한다면, 곧바로 모순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위와 같은 사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고유명에는 확정기술로 환원되지 않는 잉여가 있다. 그러므로 고유명은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이라는 성질을 갖게 된다. 그래서 아즈마에 의하면 지젝은 그것을 부정신학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지젝에 의해 라캉화된 반기술주의. 여기에서도 크립키와 마찬가지로 고유명은 확정기술의 다발로 환원불가능하다고 간주된다. 다만 고유명의 잔여=잉여는 더 이상 개개의 이름에 포지티브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라캉파 정신분석이 '대상a'라고 부르는 것, 즉 주체의 결여의 '상관물'로서 해석된다.('고정지시자'의 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상관물로서의 대상a). 고유명이 언어 내 번역(상징계에 있어 시니피앙의 상호송부운동)에 저항하는 것은, 그것이 언어체계=상징계에 난 구멍을 현재화하는 특수한 시니피앙이기 때문이다. 즉 지젝은 고유명에 언어체계의 괴델적 자괴(현실계)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둘째, 라캉파 정신분석은 자아심리학과 달리 프로이트로부터 죽음의 욕동을 계승한다. 그것은 세계 내에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목적 없는 욕동', 즉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이다. 이리하여 부정신학 시스템에서는 주체의 이중주름에 상관하는 형태로 세계의 외부가 존재하고, 그에 대응하여 주체는 자기 자신의 속성들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명을 가진 존재가 되어, '죽음의 욕동'에 사로잡힌 존재가 된다.
셋째, 후설과 하이데거의 차이점에 대한 정리도 참조해 보자. 아즈마에 의하면, 세계의 완결성, 의식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후설의 '목소리(포네)'와 달리, 주체의 '정중앙의 빈 구멍'(세계의 외부, '현실계')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하이데거의 '부름(루프)'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의, 또는 (같은 말이지만) 세계 전체가 존재한다는 것의 근원적인 '무無'를 폭로해", "일상적이고 내세계적인 주체, 즉 '사람das Man'의 동일성을 내부로부터 탈구"한다.
4-4. 초월론적 시니피앙에서 클라인의 병으로
그러나, 아즈마에 의하면 그 구멍은 초월론적 시니피앙에 의해 메워지고 '시스템=주체'에 재차 안정이 찾아든다. 아즈마에 의하면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은, "현실계가 메아리치게 하는 그런 붕괴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주체의 구멍을 메우는" "대상a"가 "모든 주체에게 필요하다"라는 논의이며, 거기서는 '대상a'로서 기능하는 이데올로기, 예컨대 스탈린주의가 비판불가능해진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은 그 자체가 앞서 서술한 '부정신학적 공동체'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대상으로서의 '사물-국가'는 구체적 내실을 완전히 결여한 숭고한 대상=무無가 되었을 때 비로소 가장 강력하게 기능하고, 또 이 기능은 모든 주체에게 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우리가 지젝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것은 고유명의 잉여, 이데올로기의 역설적 매력을 전부 주체의 이율배반으로 귀착시키는 이런 논의가 실천적으로는 부정신학적 공동체에 대한 비판을 불가능하게 하는 장치 그 자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폐쇄회로'의 출현에 대해서, 아즈마는 부정신학 시스템을 클라인의 병에 비유한다. 아즈마의 초월론적 시니피앙 체제로서의 부정신학 이해에 따르면, 부정신학 시스템에 있어서 주체는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성'에 의해, 오브젝트 레벨에서 메타 레벨로, 내부로부터 외부로, 말하자면 '초월'해 가는데, 그곳은 새로운 오브젝트 레벨, 내부, 또는 '폐쇄회로'이다.
아즈마에 의하면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은 그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부정신학 시스템은 메타레벨, 외부를 지향하지만 메타는 베타로, 외부는 내부로 환류하며 결코 충분한 메타레벨, 외부로는 도달할 수 없는 허무한 무한 후퇴에 빠질 뿐이다. 이것이 바로 클라인의 병이다.
4-5. 용어 정리
마지막으로 본 절 전체의 내용을 바탕으로 부정신학, 논리적 탈구축, 초월론적 시니피앙, 존재론적 탈구축 등 용어의 관계를 정리해 보자.
아즈마의 '부정신학' 이해에 따르면, 그것은 첫 번째 스텝으로서 주체의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성'에 의해 시스템의 완결성을 해체하고, 두 번째 스텝으로서 세계의 외부를 초월론적 시니피앙에 의해 실체화하여 시스템을 다시 안정화한다. 물론 이 두 스텝은 본 절 최초의 인용에 대응한다. 다시 인용해보자.
"논리적 탈구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초월론적 사고의 한 타입이다. (...) 논리적 탈구축의 방법은 두 가지 스텝에 의해 성립한다. 첫째로 그런 사고는 임의의 경험론적 텍스트/시스템에서 그 자신의 논리로는 제어=결정불가능한 특이점을 적어도 하나 발견한다(형식화의 한계). 둘째로 사고는 그 특이점을 통해 텍스트/시스템 이전의 차이공간 또는 '사고되지 않은 것'으로 소행한다(한계의 존재론화). 그리고 그런 소행의 정당성은 많은 경우 시적 언어의 힘에 의한 신뢰에 의해 뒷받침된다."
부정신학 시스템이란 용어는 이 과정 전체를 지시한다.
논리적 탈구축은 '시스템=세계'의 완결성의 해체를 의미하므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성'을 이용하는 첫 번째 단계는 논리적 탈구축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초월론적 시니피앙 체제'라는 용어는 두 번째 단계를 지시하며, '존재론적 탈구축'은 아즈마에 따르면 초월론적 시니피앙의 탐구를 의미하므로, 이것도 두 번째 단계에만 적용되는 용어다.
초월론적 시니피앙 체제, 또는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은 이후 아즈마의 '부정신학=초월론적 시니피앙 체제' 비판이 이론적인 비판에서 역사적 상대화로 이행함과 동시에 '냉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예컨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또한 본 절 전체에 대한 주석으로서 '부정신학'의 의미에 대해 말해두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부정신학이란, '신은 ~다.'라는 긍정 명제로 신에 대해 규정하는 행위를, 신을 인간의 인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며 신을 한정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배제하고, 신을 단지 '~이 아니다'라는 방법으로만 생각하고 논하는 입장을 가리킨다. 그럼으로써 신은 존재자가 아니게 되고, 결코 현전하지 않게 된다.
한편 아즈마는 부정신학을 긍정적=실증적(포지티브)인 언어표현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존재를 상정하는 입장으로 정의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세계 외부를 실체화하는 초월론적 시니피앙의 논리도 포함해 부정신학이라 이른다. 구체적으로는 초월론적 시니피앙으로 기능하는 스탈린주의 등이 부정신학으로 불린다. 당연하지만 스탈린은 현전한다. 헷갈리는 용어 사용일지도 모르겠다.
5. 우편-오배 시스템, '비세계적인 것'의 복수성
셋째, 부정신학 시스템에 대항하는 우편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그것도 논리적 탈구축을 행한다. 즉, '세계=상징질서'의 비완결성, 세계의 외부, '불가능한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우편 시스템은 그것을 주체의 '이중주름'과 관련해 사고하지 않는다. 우편 시스템은 언어 일반, 기호 일반과 동행하는 에크리튀르성으로 사고한다.
이 시스템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세계의 외부, 현전하지 않는 것, 경험 불가능한 것)은 '유령'으로 명명된다. 현전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상징질서에 회수되지 않는 복수의 능동적인 '유령'의 존재가, '세계=주체'의 완결성을 무너뜨린다고 여겨진다.
아즈마는 본서에서, '유령' 혹은 '비세계적인 것'이 태어나는 메커니즘을 2가지 도입하고 있다. 첫째가 '오배-산종', 둘째가 커뮤니케이션에서 속도의 차이, 우리들 안의 기관들의 정보처리 속도의 차이이며, 이것은 '리듬'이라고 불린다.
5-1. 오배-산종
첫 번째 근거인 오배 가능성과 산종부터 살펴보자. 요점은 "서명이라는 효과는 이 세계에서 매우 흔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효과들의 가능성의 조건은 동시에 그런 효과들의 불가능성의 조건, 그런 효과들의 엄밀한 순수성의 불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하다."는 데리다의 말에 집약되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호에 있어서의 '같은 것/동일성'(≒ '시니피앙/시니피에')를 구별하는 것이다.
기호란 무엇인가를 대리로 표상하는 것인데, 예컨대 'X'라는 기호는 항상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것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기호에 있어서의 '같은 것'이며, '같은 것'이란 기호 그 자체이고 기호가 놓이는 문맥이 바뀌어도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기호 가능성 조건이다.
한편, 기호의 의미, 즉 기호에 의해 대리표상되는 것이 기호의 '동일성'이라고 불리우는, 기호 'X'에 의해 이해되는 의미 내용이며, 기호의 동일성이다.
자, 어떤 기호가 기호일 수 있는 것은, 즉 기호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여러 문맥에서 사용되는 것이 필요하다 (기호 가능성 조건인 인용 가능성). 즉, '같은 것'이 여러 문맥 사이를 횡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호에 복수의 '의미=동일성'을 갖게 한다. '같은 것'이 운동하는 도중에, 그러한 '의미=동일성'은 불가피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어떤 기호의 의미에 복수성이 생기고, 그로 인해 의미의 결정불가능생이 생긴다. 기호의 의미가 다른 곳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경험, 즉 의미가 다중적이 되는 경험이 생긴다.
그 점에 있어서,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이, 즉 상징질서의 외부가, '불가능한 것'이, 혹은 재인용하자면 '임의의 경험론적 기술/시스템' 내의 '스스로의 논리로는 제어=결정 불가능한 특이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앞의 인용문 ("서명이라는~")에 입각해 확인해 보도록 하자. 'X'라는 기호, '같은 것(X)'의 운동이 기호의 가능성 조건, '모든 결과의 가능성 조건', 즉 기호가 '동일성=의미'를 가질 가능성 조건인데, 그것이 동시에 기호의 '동일성'을 흔들리게 하여 결정불가능성을 발생시킨다. 즉, '같은 것'의 운동은 "동시에 효과의 불가능성의 조건, 효과의 엄밀한 순수성의 불가능성의 조건이다".
그런데 이 기호의 동일성의 동요야말로, 아즈마의 이른바 우편적 오배의 가장 추상적인 표현이다. 이 의미의 동요 때문에, '편지=의미내용'은 수신인에게 닿지 않는 걸수도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것'의 운동 과정에 있어서, 그 결과로서 생겨나는 '의미=동일성'의 복수성과, 그것과 상관하며 생겨나는 '같은 것'의 '동일성'으로의 환원불가능성, 즉 시니피앙의 시니피에로의 환원불가능성, 의미의 결정불가능성이 '산종'이라 불린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보론 : 산종과 다의성의 차이, 산종의 다의성화
본서에서 자주 나오는 '산종'은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단순한 '다의성'과의 차이를 정리해보면, (1)'같은 것'(기호)의 운동 과정에서 생기는, (2)환원불가능한, (3)의미의 복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의성은 (3)의 조건을 충족하지만, (1)과 (2)는 충족하지 않는다.
본서의 기술에 입각해 확인해보자. 우선 (2)(3)이다. 본서 도입부에 다의성은 '귀(파롤)'에 대응하며, 산종은 '눈(에크리튀르)'에 대응한다고 써 있다.
예시로 'he war'라는 문장(?)이 제시되어 있다. war는 독일어와 영어에 동시에 속한다. '산종=눈(에크리튀르)' 수준에서 이 문장은 두 독해의 컨텍스트에 동시에 속하며, 그 중 어느 독해가 올바른지는 결정할 수 없다.
이 문장(시니피앙)은 특정한 의미(시니피에)로 환원불가능하다(그리고, 어떤 기호의 두 가지 독해 컨텍스트에의 동시 소속으로 인한 의미의 결정불가능성은, '탈구축'의 정의 그 자체이기도 하다).
한편 '다의성=귀(파롤)'의 레벨에서, 이 문장을 발음해버리면, 독일어 또는 영어 어떤 한 쪽에 속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버린다. 이런 류의 의미의 복수성은, 머지않아 결국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엔 독일어의 의미와 영어의 의미, 두 가지로 의미의 복수성은 헤아려진다. 즉 이 문장(시니피앙)은 특정한 여러 의미(시니피에)로 환원가능해진다.
다음으로 (1)에 대해 말하면, 산종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처음에 있는 건 하나의 기호(같은 것)이다. 그것이 여러 문맥에서 운동함으로써 의미의 복수성이 생긴다. 그렇지만 '다의성'의 사고는 처음부터 (또는 심층에) 복수의 컨텍스트나 구조가 있어서, 기호의 의미를 중층적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이해는 어떤 기호의 의미를 규정하는 여러 컨텍스트에 대한 소행적인 탐구로 필연적으로 이행한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사고"이다. 이러한 자세로는, 머지않아 복수의 '컨텍스트=의미'는 전부 파악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기호(시니피앙)는 복수의 의미의 다발 (시니피에)로 환원가능해져 버린다. 그것은 '다의성'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산종'은, (1)'같은 것'(기호)의 운동 과정에서 생기는, (2)환원불가능한, (3)의미의 복수성이며, 게다가 (2)(그것을 운동의 결과로서만 파악하기 때문에)환원불가능한 것, 의미의 결정불가능성을 경험케 하는 것으로서 포착된 무언가이다, 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의 복수성을 기호의 운동과 분리하여 환원가능케 하는 몸짓은 '산종의 다의성화'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산종의 다의성화'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해 보자.
이 용어는 본서에서 몇 번 사용되고 있지만,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독해가 용이할 것이다. 그것은 형의상학적 산종의 다의성화와, 부정신학적 산종의 다의성화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이스회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 형이상학적 다의성화이고, 리오타르, 크립키=지젝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 부정신학적 다의성화이다.
전자는 의미의 복수성을 기호의 운동으로부터 분리해 다의성화함으로써, 기호의 의미의 복수성을 환원가능하게, 즉 시니피앙을 시니피에로 환원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한편 후자는 기호의 의미가 지닌 환원불가능성, 즉 시니피앙의 시니피에에 대한 환원불가능성을 기호의 운동과는 분리해 인식하고, 시니피앙에 깃든 시니피에에 대한 잉여를 실체화하며, 무언가 다른 방법(아우슈비츠라는 트라우마, 원초적 명명의 신화, '현실적인 것'...)에 기초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5-2. 부정신학 시스템과의 차이
그런데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이리하여 우편 시스템에 있어서는, 개개의 시니피앙이 그러한 '의미=동일성=시니피에'에 대한 과잉을 갖고, 많든 적든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이 된다. 즉 데리다의 용어로 말하자면 에크리튀르로 되어 간다. "'에크리튀르'라는 술어는, (...)동일성을 가지지 않는 기호의 운동을 가리킨다".
이 에크리튀르에서 상징질서의 '구멍', 상징질서에 속하지 않고 현전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그래서 주체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복수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부정신학 시스템과 우편-오배 시스템의 차이는, 그것이 세계=상징질서의 외부를 사고할 때, 한 쪽은 주체의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성을 이용하는 데 반해, 다른 한 쪽은 개개의 단어가 운동하는 가운데서 생겨나는, 단어의 '동일성'에 대한 잉여, 시니피앙의 에크리튀르화, 개개의 시니피앙에 깃든 '이중성'을 이용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아즈마는 지젝에 항거하며 우편적 논리에 따라 고유명의 잉여도 기초한다. 이에 대해선 <자유를 생각한다─9.11 이후의 현대사상>의 설명이 간결하다.
"일반적으로는, 한쪽에 인간의 실존적 본질, 즉 '고유명'이 있고, 다른 한쪽에 인간의 여러가지 특징의 집합체, 즉 '확정기술'이 있다고 파악한다. (...) <존재론적, 우편적>에서는 (...) 제가 주장한 것은 이렇습니다. 고유명과 확정기술, 이 양자는 형이상학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고유명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혼자 존재해서 생성하는 것이 아니다. 고유명이란, 이름이 사회 속에서 전달되며 다양한 '오배'나 '오해'에 노출되어 여러 번 정정됨으로써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그 조건이 '오배 가능성'입니다."
'고유명'의 기호가 여러 문맥을 운동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에 부여되는 '확정기술=동일성'에 동요가 생긴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고유명'의 '확정기술'로의 환원불가능성(=산종). '확정기술'이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나의 경험적 동일성이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의 상관물로서 '고유명'의 잉여가 존재한다.
5-3. 속도의 차이=리듬의 충돌
이상으로 우편-오배론과 그에 따른 고유명론을 끝마치고, 다음으로 '유령'의 제2근거인 '속도의 차이'='리듬의 충돌'을 살펴보자.
이 근거는 내가 아는 한 <사이버스페이스는 왜 그렇게 불리우는가>(<정보환경논집> 수록)에 있는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설음>에 대한 논의를 마지막으로 방치되고 있어, <자유를 생각한다>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까지 이어지는 오배론과는 꽤나 다른 운명을 맞은 논의로 보인다.
아즈마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속도가 다른 커뮤니케이션 모드, 혹은 정보처리 속도가 다른 우리의 내적 기관 사이의 충돌이, "단일의 주체에 대해 나타나는 단일의 세계"라는 구도, 즉 세계=상징질서 사이의 완결성을 미세하게 뒤흔들어, 비세계적인, 섬뜩한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예로서 등장하는 것이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설음'에 대한 분석이다. 프로이트는 한 친구에 대해 생각하던 도중, 그 친구와 마주치는 섬뜩한 경험을 했다.
이를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친구가 멀리 떨어져 있던 시점에서 프로이트의 눈은 그를 포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쾌한 친구이기 때문에 지각이 억압되고 의식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의식은 억압된 정보를 이용해 독자적으로 연상 작용을 일으켜, 친구를 마음에 떠오르게 한다.
그 상태에서 친구와의 거리가 가까워짐으로써, 프로이트는 친구에 대해 생각할 때 그와 마주친다는 섬뜩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여기선 그런 섬뜩한 체험이 여러 기관의 정보 처리 속도의 차이로서 설명된다. 주체의 통일성이 흔들리고, 주체에게 타자의 리듬이 도입된다는 것이다.
5-4. 우편공간
유령론의 마지막, 우편공간 또는 데드 스톡 공간이라는 용어를 확인해 보자. 이건 '유령'과 같은 비세계적인 효과가 발생하는 공간을 말하는 거지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명백하게 밝혀진 대로, 이는 세계 밖에 있는 비세계적인 공간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 그 자체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 일체가, 가능한 우편공간이며, 오배의 속도와 차이 외에 무언가 별다른 외부적인 비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4장에서는 그러한 우편공간의 특권적인 예로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그것을 연결하는 전이공간이 도입된다. 무의식은 시니피앙(언어 표상)을 에크뤼티르(물체 표상)화하는데, 그 에크뤼티르를 통해 의식을 거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주체간에 커뮤니케이션이 행해지는 것을 '전이'라고 한다.
무의식에서는 '동일한' 에크리튀르가 특정 '동일성'을 가지지 않은 채 (=시니피앙화되지 않은 채), 복수의 무의식 사이를 횡단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며, 그것이 전이이고, 거기서 주체에게 타자의 리듬이 도입된다.
아즈마에 의하면, 데리다는 그 점에 주목해, 한 시니피앙으로부터 동일성을 추출해 에크뤼티르화 한 뒤, 거기에 다른 동일성을 흘려 넣는 식으로 무의식으로의 개입을 도모하는 전략을 개발했다. 그것은 '같은' 이름에, 다른 '동일성'을 흘려넣는 전략이며, 오래된 '이름' 자체는 유지되기 때문에 '고명paléonymie' 전략으로 불리운다.
이리하여 무의식은 순수한 에크뤼티르, 즉 '순수한 유령'이 존재해, 그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생기는 특권적인 장소로 도입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전이 공간은 이미 "편지 왕래의, 인간관계의, 연결기의, 편지왕래의 네트워크에, 그리고 산종의미적, 우편적, 철도적인 선별에 의거하는 하나의 은유"이다. 이러한 것들은 전이 공간에 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5-5. 욕동과의 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욕동관계 관계를 통해 우편-오배 시스템의 입장을 확인해보자. 아즈마에 의하면, 라캉-부정신학에는 주체의 이중주름성에 대응해 단 하나 '불가능한 것',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 '닿을 수 없는 편지'가 존재하지만, 그 외의 시니피앙에 대해서 '욕동을 대리하는' 시니피앙이 "분할되어 복수화되고, 파괴되어 행방불명될 가능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있다. 편지가 닿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즈마에 의하면, 라캉-지젝에 있어서 '현실계'의 관념은, "언어체계를 한 번 전체로서 파악한 후, 재차 그 전체성을 탈구축하는(괴델적 결정불가능성으로 이끄는) 것"으로 획득될 수 있으며, 그들은 "상징계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개개의 시니피앙의 오배가능성을 말소"해야하기 때문에, 이러한 배제는 필연적이다.
이리하여 라캉은 욕동을 (이념적인) 시니피앙으로 해석함으로써 "욕망의 수신처를 결정"하고, "그것에 호응해 주체의 장소를 정해"버린다. 반면에 데리다는 욕동의 표상대리를, 끊임없이 오배될 수 있는 (물질적인) 에크뤼티르로 파악하기를 제안한다. 아니, 에크뤼티르란 기호 일반의 조건이므로, 그렇게 파악되어야만 한다.
"에크뤼티르는 이념적 동일성에 제어되지 않고, 끊임없이 분할되며 오배된다. 결과적으로 데리다의 퍼스펙티브에 있어서, 욕동의 군체는 하나로 수렴하지 않고, 주체도 끊임없이 확산, 데리다의 술어로 말하자면 '산종'하고 있다."
6. 정리
이상으로, <존재론적, 우편적>의 논의를 간결하게 정리한다는 본고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본서에는 세 가지 사고의 시스템을 도입해, 그 차이를 위주로 살펴보았다.
그것은 언어적인, 상징질서로서의 우리 세계의 구조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다. 형이상학에서는 이 세계의 외부가 없다. 부정신학에서는 주체의 이중성, 주체가 세계의 일부인 동시에 세계의 한계라는 점에 따라 세계의 외부가 하나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편-오배'의 입장에서 보면 기호는 기호이기 때문에 복수의 문맥 사이를 운동해야 하며, 결과적으로 반드시 환원불가능한 의미의 복수성을 지니게 된다. 거기서 언어적 세계의 외부가 균열된 틈이, '유령'이 나타나기 위한 틈이, 무수하게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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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우편적 먼저 읽고 읽어봐야겠다
생각보다 별로라 출판년도 봤더니 98년이네 뭐 그러면야..
묵혔다 지금 봤는데 뒤는 그래도 괜찮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