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께, 눈발이 희뜩거리던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져 무턱대고 새벽 첫차로 상경했노라며, 내가 출근하기 전부터 내 근무처 건물의 지하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박용래씨만 해도, 그가 정과 한에 어혈이 든 눈물의 시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실로 그날 아침의 일이었다.
  아침 9시부터 백제 유민 박씨와 나는 난로가 후끈한 중국집 식탁에 늘어붙어 창밖에 쏟아지는 함박눈을 내다보며 고량주를 마셨다. 하늘의 선심 같은 푸짐한 눈발 때문이었겠지만, 씨는 불쑥 밑동 없는 말을 내놓았다.
  "왜정 때, 내가 조선은행에 댕길 적에 말여…"
  씨는 전재민같이 야윈 손가락으로 고량주 잔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조선은행권 현찰을 곳간차에 가득 싣고 경원선을 달리는디,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루 달리는디 말여…"
  "경비원으루 묻어갔었다-- 그 말이라…"
  "야, 너 웨 그러네? 웨 그려? 이래봬두 무장 경호원이 본인을 경호하던 시절이 있어야. 현찰 운송 책임을 내가 자원해서 했던 거여. 너 참 이상해졌다야. 웨 그려? 오-- 그 눈… 그 눈송이… 그 두만강…"
  "……"
  "이까짓 눈두 눈인 중 아네? 눈인 중 알어? 너두 한심허구나야… 원산역을 지날 때 눈발이 비치더니, 청진을 지나니께 정신웂이 쏟어지는디, 아-- 그런 눈은 처음이었었어… 아-- 그 눈… 그 눈…"
  그는 이미 떨리는 음성이었고 두 눈시울에는 벌써 삼수갑산 저문 산자락에 붐비던 눈송이가 녹으며 모여 토담 부엌 두멍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차가 두만강 철교를 근너가는디… 오! 두만강-- 오, 두만강! 내 눈에는 무엇이 보였겄네? 눈! 그저 그 눈! 쌓인 눈, 쌓이는 눈… 아무것두 안 보이구 눈 천지더라. 그 눈을 쳐다보는 내 마음은 워땠겄네? 이 내 심정이 워땠겄어?"
  "워땠는지 내가 봤으야 알지유."
  "그러냐, 야, 너두 되게 한심허구나야. 그래가지구 무슨 문학을 헌다구. 나는… 나는 울었다. 그냥 울었다. 두만강 눈송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한없이 그냥 울었단 말여…"
  어느덧 그의 양어깨에 두만강 물너울이 실리면서 두 볼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오, 두만강… 오, 두만강 눈… 오… 오…"
  그는 아침 9시 반부터 두만강을 부르며 울기 시작하여, 그날 밤 9시 반이 넘어 여관방에 쓰러져 꿈결에 두만강 뱃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







「잡목림」


  낙엽 져
  비인
  잡목림은
  허술한

  마을
  식후 풍경,

  사락 사락 싸락눈

  비뚤어진, 기둥에 온다

  논길 살얼음에 온다

  후조가 운다,

  낙엽 져
  벌거숭이
  잡목림은
  조석으로

  쓸쓸한 마을
  초가 지붕.


- 『싸락눈』(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