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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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야곱이 병 듭니다. 소식을 들은 요셉은 두 아들과 함께 200km가 넘는 나일강 삼각주를 횡단해 도착합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요셉의 도착 소식을 알린다는 서술은 이 비현실적인 설화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띌 만큼 성의 없어 보입니다.


다시 재발행되는 '신과 아버지가 내리는 편애하는 자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란 어음. 이번 어음에도 만기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셉보다 요셉의 자녀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먼저 축복하려는 야곱도 성서 전체의 기묘한 클리세인 '차남에 대한 편애'를 되풀이합니다.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요셉에게 '세겜' 땅의 소유권을 갖게 될 것을 예언하며 그 땅을 '내(야곱)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충실하게 창세기를 읽어온 독자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어디에서도 야곱은 아모리 민족은 물론 어떤 이방인과도 무력으로 싸운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3장엔 야곱이 '세겜 성읍 앞의 땅'을 돈을 주고 사는 장면이 나올 뿐이고, 34장에선 앞서 다룬 야곱의 아들들에 의한 '혼인 빙자 학살' 사건이 등장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야곱은 학살 자체와 주동자인 아들 시므온과 레위를 일관되게 책망하고 저주했습니다.


이 무성의한 모순에 대한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설명도 예측 가능합니다. 야곱의 칼은 물리적 폭력이 아닌 믿음과 신앙의 칼이었다, 축복할 당시의 야곱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은 야곱 자신 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삭-야곱' 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혈통 속 가부장을 통칭하는 것이다, 등이 그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이성이나 역사, 실증을 중시하는 제 관점 뿐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성서 해석의 관점에도 어긋나는 왜곡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했고,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을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의 특정 부분이 문자 그대로가 아닌 성서 특유의 비유나 상징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선 인접한 부분 혹은 100번 양보해 성서 전체에 비슷한 용례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설마 이 공리에 대해서도 반론하는 신자가 있진 않겠지만, 성서의 모든 구절에 대한 개인적 해석과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독 미국과 우리나라에서만 융성해온 수많은 이단 교주들의 제 멋대로 자의적일 수 있어서 끔찍한 악의와 저능함으로 충만해진 해석과 그 해석이 종교와 사회에 끼친 해악이 결과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물론, 성서 전체를 살펴봐도 칼과 활 등의 무기를 신앙, 믿음 등의 관념과 연결한 사례는 희귀합니다.


딱 둘 뿐인 예외는 시인이자 용맹한 왕이었던 다윗이 시편에서 여호와의 분노를 칼로 묘사한 사례와, 자칭 사도인 바울이 서신서에서 성도의 믿음을 전신갑주에 비유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까지 쪼개는 힘을 가진 칼로 비유한 경우 뿐입니다.


'나'라는 인칭을 조상과 겸해 표현한 사례도 성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되려 성서는 해당 조상들을 언급해야 할 상황이 되면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에서 보듯 지루할 정도로 정확하고 장황하게 인물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이쯤 되면 누가 과해석을 하는 것이고, 누가 성서와 베드로, 마르틴 루터의 원칙을 무시한 채 반 기독교적이며 편의주의적이고 자의적이며 결과론적이어서 더없이 위험한 만능의 논리로 성서를 오독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렇듯 지금까지 살펴본 창세기 속엔 A. 시대를 초월한 영성과 지혜를 가졌던 저자의 글과, B. 유대 민간에 전승되던 설화와 민담, C. 특정한 의도와 목적을 위해 급조되어 A와 B사이에 삽입된 내용이 혼재합니다. 제가 유독 긴 분량을 할애해 비판하는 모순은 C를 A, B 속에 서투른 솜씨로 넣느라 빚어진 한심한 모순이 대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