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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개의 문자(A-Z, 0-9)로 임의의 문자열을 만든다. 그 문자열을 소리로 들려 준다. 딱 한번. 


자, 스무번째 문자의 소리가 들렸다. 이제 첫번째 문자부터 순서대로 말해 보아라. 


첫번째로 들린 문자가 무엇이었나? 




아마 첫번째로 들린 문자는 머릿속에 온데간데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후 또 다른 열아홉 개의 문자를 듣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이때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첫번째 문자를 분명히 제대로 들었는데, 왜 스무번째 문자가 들린 후에는 기억나지 않는가?


문자열의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머리에서 어떤 과정이 벌어졌는지 간략히 살펴 보자.




소리를 처리하는 뇌 영역―청각 피질이 먼저 반응한다. 무슨 문자인지 파악하고, 기억하기 위해 뇌 곳곳에 신호가 전달된다. 문자는 하나씩 들리기 때문에 지금 들리는 문자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들린 문자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메커니즘을 단순화하였음에 유의하라)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지금 들리는 문자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들린 문자가 무엇이었는지 기억"


점차 희미해지려는 과거의 문자들을 붙잡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새로운 문자를 거기에 덧붙여야 한다. 


과거의 문자를 머리에 붙잡아두는데 너무 집중하면, 현재 들리는 문자는 흘려 듣게 된다. 반대로 현재 들리는 문자에 너무 집중하면, 과거에 들은 문자가 서서히 희미해진다.


딜레마이자 난제이다.




글을 읽을 때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야 종이에 이미 문자가 다 써져 있으니까. 다르게 말하면, 문자열이 종이에 '펼쳐져' 있으니까. 앞 문자가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보면 그만이다. 


소리는 그렇지 않다. 아, 녹음해서 다시 들으면 되지 않느냐고? 소리는 임의접속(random access) 능력이 텍스트에 비해 떨어진다. 


(임의접속 개념은 백남준에게서 빌렸다; "책은 임의접속이 가능한 정보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텍스트 상에서 앞에 나온 문자가 기억나지 않으면, 눈동자를 '살짝' 굴려 '슬쩍' 쳐다보면 그만이다; 임의접속이 원활하다.


한데 소리는 어떠한가. 아까 들린 문자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오디오를 특정 부분부터 다시 들어야 한다. 이때는 터치나 마우스 클릭을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오래된 오디오 저장 매체라면 되감기를 하거나 처음부터 다시 들어야 할 수도 있다. 이때 소요되는 시간도 고려하자.


요컨대 소리는 텍스트와 달리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소리는 흐른다. '펼쳐져' 있지 않다; 임의접속이 불편하다.


하여튼 그럼에도 소리는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지 않은가? 대화할 때도 소리로 대화하고⋯ 당연하지만 일상 속 실시간 대화는 되감기도 안 된다.


그래서 못 들었거나 기억이 안 나는 내용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다시 말하기를 요청하는 모습이 정말 흔하다.




주제에서 좀 멀어진 것 같다. 


요약하면, 텍스트는 쓰여 있기 때문에 이전 내용을 외울 필요가 없는데, 소리는 '지금만' 들리기 때문에 이전 내용을 기억하고, 거기에 지금 들리는 내용을 덧붙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이 한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작업 기억이 딸리면, 상대에게 말을 되물을 확률이 높다. 


소위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사람, 귀가 안 좋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은 사실 청각 자체에는 이상이 없는데, 이 작업 기억이 떨어지는 것일 수 있다.


상대의 말이 조금만 길어져도 그 전 내용을 까먹으니 맥락 파악이 어렵다.


글로 된 긴 만연체 문장을 이해하는데에도 어려움이 크다. 


상대가 아까부터 지금까지 해 온 말을 곱씹고, 종합하며, 기억해서 현재 하는 말과 연결짓고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작업 기억의 역할이다. 


한데 이 능력이 딸리니, 이해가 더디고 집중력과 주의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낙담하지 마시길. 작업 기억은 쉽게 향상시킬 수 있다.)


눈치챘겠지만, 작업 기억은 학습 능력과도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연구에 따르면, 한 학생의 작업 기억력으로 그 학생의 수 년 후 성적을 90% 이상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레퍼런스를 포함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참고)


요컨대 작업 기억과 성적은―IQ와 성적보다―정비례 관계에 있다.


(작가왈, IQ는 여러가지 이유로 낡았다; 본서 참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지금까지 쓴 내용의 맥락 흐름을 자꾸 잊어버려서, 위에서부터 강박처럼 다시 읽고 있다⋯. 작업 기억이 딸리나 보다.


좌우간, 작업 기억이 이렇게 중요하다. 


"작업 기억이 중요한 것은 알겠으니 이제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지 알려 주어라"


작업 기억은, 작업 기억을 거듭 사용함으로써 강화시킬 수 있다. 


뭐 이런 원론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나 싶겠지만, 본서가 말하는 바는 이것뿐이다.


이 책에서는 작업 기억을 좋게 유지할 수 있는 그럴듯한 방안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 기억을 테스트할 수 있는 시험도 나온다. 


하나 유의미하게 작업 기억을 향상시킬 수 있는 훈련 방법은 '직접' 다루지 않았다. '간접'으로만 다루었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만의 작업 기억 훈련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이 책에서는 작업 기억을 어떻게 훈련해야 할지 힌트만 던져 준다. 


(본서에서 여러번 언급한 '정글 메모리' 프로그램은 로스트 미디어가 된 듯하다)


작업 기억에 관하여 잘 이해한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 작업 기억을 향상시켜야 할지 감이 올 것이므로 자세히 다루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다루지 않겠다.


이상 더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직접 읽어라.